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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박사와 함께하는 ‘어린이 프로파일러 설록의 사건 일지’ <15> 설록의 아버지와 M 그리고 모리아티 게임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오은우

마침내 설록 앞에 나타난 M, 그의 목적은 복수였다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설록은 참담한 패배감과 자책감에 빠져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홍주를 구할 수 없게 되었어.”

사회자가 요란하게 손뼉을 치며 우승자 이지용에게 다가왔다.

“역시 천재다운 놀라운 추리력과 논리력을 보여준 이지용군, 승리의 대가는 소원 성취입니다. 자, 소원을 말해 봐~요!”

지용은 설록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순간의 침묵을 참지 못하고 사회자가 말을 이었다.

“소원이 너무 많은가요? 그래도 딱 한 가지만 골라야 한답니다. 대학 진학까지 학비? 해외 유학? 최고급 컴퓨터? 과연 천재 소년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침묵 끝에 지용이 내놓은 답은 너무나도 예상 밖이었다.

“제 소원은 설록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사회자도, 관객도, 심지어 설록마저도 너무 놀라 입을 크게 벌린 채 지용을 바라보기만 했다. 사회자가 신중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놀라서 좀 당황스러운데요, 평생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횐데 자신에게 패한 상대방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지용은 주저 없이 답했다.

“부모님은 제게 늘 제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상과 복이 과하면 자만하게 되고,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된다는 말씀도 하셨죠. 저는 오늘 승리했다는 만족감만 상으로 받겠습니다. 아까 사회자께서 설록군이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다고 했는데, 사연이 뭔지는 모르지만 설록군에게는 이 게임의 승리가 절실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설록군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날 무대를 향한 것 중 가장 큰 박수 소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설록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사이, 사회자에게 새로운 메모가 전달되었다. 하지만 이미 설록에게 소원을 물어본 뒤였다. 설록은 큰 소리로 “제 친구 홍주를 구해주세요!”라고 외쳤다. 설록의 외침과 동시에 메모를 읽은 사회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객석 맨 뒤쪽 조종실을 응시하던 사회자가 이내 밝은 목소리로 마무리했다.

“네, 고맙습니다. 오늘 스릴과 흥분, 그리고 감동의 무대를 만들어 준 설록과 지용, 두 친구에게 힘찬 박수 부탁드립니다. 다음 대회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모두 안녕히 가세요!”

무대의 막이 내려지고 퇴장 음악이 신나게 울려퍼졌다. 조명이 전부 켜지고 모든 출입문이 활짝 열리면서 바깥의 빛도 쏟아져 들어왔다. 관객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낄 틈도 없이, 감동을 안은 채 웅성거리며 퇴장했다. 진혁과 대홍은 밀려나오는 사람들을 헤치고 무대 위로 올라가 두터운 막을 제치고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반대편으로 이지용군이 걸어나가는 뒷모습만 겨우 볼 수 있었다.

무대 뒤로 사라진 설록

대홍이 그를 쫓아가려고 하자 진혁이 붙잡았다.

“잠깐, 우리 목표는 이지용이 아니라 설록이야. 무대를 잘 살펴보자.”

그 말에 대홍이 휴대전화를 꺼내 손전등 앱을 켜고 무대 바닥을 비추었다. 둘은 필사적으로 이곳저곳을 살폈다. “저기!” 진혁이 가리킨 곳에 작은 천 조각이 찢긴 듯 붙어 있었다. 설록이 입었던 셔츠와 같은 색깔이었다. 진혁이 손가락으로 더듬더니 어느 한 부분의 틈을 비집어 잡고 들어올렸다. 가로 세로 1미터 정도의 네모난 통로가 나타났다. 둘은 휴대폰 손전등을 비추며 지하 통로를 따라갔다. 한참을 달려가자 희미한 불빛이 나타났다.

철제로 된 임시계단을 올라가자 땅 위였다. 나무와 철로 만들어진 건물과 선로, 기둥들이 복잡하고 어지럽게 공중에 얽혀 있었다. 낡아서 녹이 슬고 검은 기름때로 여기저기 얼룩져 있었다. 바닥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폐쇄된 광산 같은 느낌이었다.

“아, 생각난다. 여긴 드래곤 특급이야!”

갑작스러운 대홍의 말에 진혁이 “드래곤 특급?”하고 되물었다.

“그래, 옛날에 유치원 다닐 땐가 부모님이랑 판타지 랜드 자주 왔었는데, 아주 빠르고 무서운 놀이기구 옆을 지나면서 내가 막 울고 그랬어. 그런데 언젠가 운행을 중단하고 폐쇄했다는 뉴스가 나왔었지.”

이제 알겠다는 듯 대홍이 앞장을 섰다. 폐쇄된 놀이기구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중간쯤 올라갔을 때 진혁이 갑자기 앞서가던 대홍의 허리를 잡았다. 놀라 돌아서는 대홍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댔다. 곧 멀리서 사람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두 친구는 온 신경을 집중해 소리의 방향을 찾았다. 위쪽이었다. 둘은 계단 삐걱이는 소리를 최대한 줄이려 애쓰면서 한 발 한 발 올라갔다. 목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졌다. 건물의 꼭대기,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대기하던 장소에 다다른 진혁과 대홍은 몸을 숨기며 입구 가까이 다가갔다.

낡고 녹슨 ‘드래곤 특급 기차’가 선로에 놓여 있고, 그 앞 대기 공간에 어른 둘이 서 있었다. 반대편에는 설록이 서 있었다. 구석까지 샅샅이 살피던 진혁의 눈에 홍주의 모습이 잡혔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니, 묶여 있었다. 팔과 몸 위로 로프가 감겨 있고 입에는 수건으로 재갈이 물려 있었다. 진혁의 눈에 핑하고 눈물이 돌았다. 곧바로 뛰어나가려는 진혁을 대홍이 붙잡았다.

“진혁아, 안 돼. 침착해야 해. 우리마저 잡히면 홍주에겐 희망이 없어.”

진혁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겨우 진정했다.

납치된 홍주, 그리고 표 박사

설록과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사회자는 어정쩡하게 서 있기만 했다.

“당신이 M인가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네가 여자친구를 구할 수 있느냐, 아니면 함께 사라지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죠, 우리 어린이들한테?”

“너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아주 많이 있단다.”

“표 박사님에게 복수하시는 거죠?”

‘M’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순간, 움찔하는 듯했다.

“복수라….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는구나. 처벌, 응징, 이런 단어가 어울리지.”

“어른들끼리 직접 해결하실 것이지 왜 비겁하게 어린이를 이용하시죠?”

“역시, 제 애비를 닮아 건방지고 말이 많구나.”

“제 아버지를 아시나요?”

순간 설록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놀람과 의문, 슬픔 등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친 듯했다. 남자는 대답 대신 큰 소리로 웃어대더니 잠시 후 뒤쪽 바닥에서 축구공 같이 생긴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검은색이었고, 마치 수박 꼭지처럼 끈이나 줄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남자가 사회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사회자는 “네”하고는 뒤쪽 창고 같은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 휠체어를 끌고 나왔다.

진혁과 대홍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휠체어에는 표 박사가 묶여 있었다. 입에는 홍주처럼 재갈이 물린 채였다. 설록이 표 박사에게 달려가려 하자 남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렇게 쉽게는 안 되지.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건 폭탄이다. 내 허락 없이 움직이면 이 폭탄은 표 박사나 홍주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터지게 될 게다.”

그때, 남자의 목에 화상을 입은 상처, 흉터가 보였다. 제주에서 이무중 검사를 살해한 박상복이 ‘초조대장경’을 건네준 사람의 목에도 화상 흔적, 흉터가 있다고 했었다. 이제 그가 ‘M’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제 대충 무대가 완성되었구먼. 20년 전에 중단되었던 게임을 끝내보자고. 비겁한 두 친구가 더러운 배신과 모의로 내 몸과 인생을 파괴해 버린 그 게임, 이제 진정한 승부를 가려야지?”

M의 목소리에서는 섬뜻한 원한과 복수의 감정이 짙게 묻어났다. 아이들의 피부에는 닭살 같은 소름이 좍 돋았다.

“자, 잔인한 표 박사가 개발한 살인 게임, 모리아티 게임 방식은 잘 알 테니, 불운하게 떠나버린 네 아버지 대신 중단된 게임을 계속해 주기 바란다.”

M의 말에 설록은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아버지… 라니….”

“잔인한 표 박사가 네 아버지와 얽힌 악연에 대해 말해 주지 않은 모양이군. 안타깝지만 지금 그 오랜 사연을 다 말해 줄 여유는 없구나. 자, 게임을 시작할까? 이 게임의 묘미는 바로 이 시한 폭탄이다. 매번 질문과 답변 차례가 돌아오면 15초 타이머가 작동하고, 시간을 넘기면 터지게 되는 진짜 폭탄. 마지막 승패가 갈리는 순간에도 패자의 손에서 터져 버리지.”

“아저씨 목에 있는 흉터가 20년 전 폭탄이 터져서 생긴 건가요?”

설록의 질문을 받은 M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목의 흉터…? 크크크”

서늘한 웃음소리와 함께 M은 입고 있던 셔츠를 양쪽으로 좌악 잡아당겼다. 단추가 사방으로 튀어나가며 가슴팍과 배가 드러났다. 끔찍한 화상 흉터와 수술 흔적이 상체 전면을 뒤덮고 있었다.

표창원 박사는… 1966년생. 범죄심리학자. 탐정 셜록 홈스에 매료돼 경찰대학에 진학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경험하고 전문적인 범죄수사를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 1997년 엑서터 대학에서 범죄학 박사를 받았다. 한국 최초 범죄심리분석관으로 활동하다 2001년 경찰대 교수로 임용, 2012년까지 재직했다. 퇴직 이후 표창원의 범죄과학연구소를 열고 범죄심리학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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