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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29> "아무도 나를 못 막는다"…마오, 반대 불구 장칭과 혼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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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중공 총서기 장원텐은 1959년 펑더화이를 지지하다 실각했다. 문혁 시절 장칭에게 온갖 박해를 받다 병사했다. 생애 마지막 매화 구경 나온 장원텐 부부. 1976년 2월, 장수(江蘇)성 우시(無錫).

1989년 9월 20일, 한때 중국의 4인자였던 천보다(陳伯達·진백달)가 세상을 떠났다. 사망 일주일 전, 옌안 시절을 회상하며 장칭(江靑·강청)과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하루는 늦은 저녁 먹고 산책을 나갔다. 개울가 다리 앞에 다다랐을 무렵, 두 여인이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워낙 폭 좁은 다리였다. 올 때까지 기다렸다 건너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한 명은 모스크바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나와 악수를 나눈 후 장칭 동지라며 함께 오던 여인을 소개했다. 상하이의 대스타 란빈이라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천보다는 장칭의 첫 번째 남편 황징(黃敬·황경)과 막역했다. 장칭의 두 손을 잡고 황징의 근황까지 장황히 설명했다. “황징은 정말 좋은 친구다. 베이핑에서 함께 일했다. 옌안에 오기 전 시안(西安)에서 헤어졌다.” 천보다는 두 사람의 이혼 사실을 몰랐다. 장칭의 안색이 변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1938년 3월 캐나다 의사 노먼 베쑨(Henry Norman Bethune)이 중국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옌안을 찾았다. 2개월 체류하는 동안 항일군정대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본국에 장문을 송고했다.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대학”이라며 한 여학생에 대한 찬사를 잊지 않았다. “여학생 중에 상하이의 저명한 배우 출신이 한 명 있다. 몇 개월 전만해도, 이 학생은 사치와 향락의 늪에 빠져 있던, 뭇 남성들의 애완물이었다. 지금은 묽은 좁쌀 죽과 호박으로 끼니를 때운다. 여덟 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동굴 속에 기거하며 흙 바닥에서 단 꿈을 꾼다. 루즈도 없고, 분(粉)도 없고, 향수도 없다. 일반 학생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매월 지급되는 1원으로 비누와 치약을 사는 게 고작이지만 소나무를 오르는 다람쥐처럼 활발하고 패기가 넘친다.” 노먼 베쑨은 이 여학생이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부인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이듬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중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여인이 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마오쩌둥이 장칭과 결혼한 것을 '잘못된 선택, 실패한 선택'이라고 단정한 역사서들이 많다. 문혁 시절 장칭과 4인방의 죄상을 강조한, 권위를 자랑하는 연구물일수록 정도가 심하다. 역사적 관점에서라면 어쩔 수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발전하거나 변하는 것이 남녀관계다.

1930년대 말 마오쩌둥은 말로만 듣던 장칭을 옌안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마오는 중국의 혁명세력을 대표했다. 장칭은 화려한 상하이를 뒤로하고 제 발로 옌안까지 온, 누가 뭐래도 가장 진보적인 연예인이었다. 마오는 장칭의 이런 점을 좋아했다. 연애에 빠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훗날, 장칭은 마오쩌둥과의 인연을 비서에게 말한 적이 있다. “주석은 예술을 통해 나를 알게 됐다. 항일군정대학 시절 밤마다 연극무대에 섰다. 사람들은 공연을 관람한 주석이 내게 호감을 느낀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옌안에 오기 전부터 주석은 나를 알고 있었다.”

장칭은 중국의 살림꾼 천윈(陳雲)을 경멸했다. 문혁 초기의 천윈과 마오쩌둥.

마오쩌둥이 장칭과 결혼을 결심하자 옌안이 술렁거렸다. 원로 당원들 간에도 “과거가 너무 복잡하다. 당의 영수와 결합하기엔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군 지휘관들도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팔로군 총정치부 조직부 부부장 후야오팡(胡耀邦·호요방)이 중앙 조직부장 천윈(陳雲·진운)을 찾아와 군의 동향을 보고할 정도였다. 천윈은 상하이의 지하당에 지시했다. “장칭은 숫한 염문을 뿌리고 다닌 구사회의 연예인이다. 과거를 샅샅이 조사해 보고해라.”

북방국에 극성맞은 간부가 한 사람 있었다. 신문과 잡지에 실린 장칭에 관한 기사들을 깡그리 모아 옌안의 '마르크스-레닌 학원'으로 발송했다. 학원 간부들은 연명으로 마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마오와 이혼하고 소련에 체류중인 허즈전(賀子珍·하자진)까지 거론하며 반대를 분명히 했다. “무슨 이유가 있는지는 몰라도 현재 거론되는 여인과의 결혼은 절대 안된다. 당과 주석에게 미칠 영향이 너무 크다. 우리는 주석과 허즈전의 이혼은 반대하지 않았다. 당원 동지 중에도 훌륭한 신부감이 많다. 풍류여인은 절대 안된다.”

전 총서기 장원톈(張聞天·장문천)은 모두의 의견을 취합했다. 서신을 통해 마오쩌둥에게 호소했다. “남녀관계는 극히 사적인 문제다. 누구의 간섭도 받을 필요가 없다. 혁명동지 허즈전과의 이혼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의 심정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현명한 결정 있기를 갈망한다.”

딸 리나(李納)와 함께한 마오쩌둥과 장칭. 1954년 가을 베이징.

그 누구도 마오쩌둥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마오는 장원톈의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나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장 결혼식을 올리겠다." 이튿날 장칭과 마오의 단출한 결혼식이 열렸다. 식탁 두 개에 사탕과 돼지고기 차려놓고 친구 몇 사람만 초대했다. 꼴 보기 싫다며 장원톈은 부르지도 않았다.

천보다도 참석하지 못했다. 마오쩌둥의 초청을 받았지만, 장칭에게 쫓겨났다. 좋아하는 돼지고기 한 점도 못 얻어먹고 되돌아갔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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