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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회적 불임과 난자 동결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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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이정헌
도쿄 특파원

“아기를 낳지 못하는 쓰라린 아픔을 겪지 않으려면 난자도 나이를 먹는다는 걸 지금부터 알아 두세요.”

 일본 도쿄 분쿄(文京)구가 ‘난자의 노화’를 다룬 책을 최근 발간했다. 중학교 3학년을 위한 성교육 부교재다. 성병과 낙태의 위험 등 성관계의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던 기존 교재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25~35세 전후가 임신 적령기다. 35세 이후엔 난자 수가 급격히 줄고 질이 떨어진다. 중학생들에게 일찌감치 난자의 노화를 가르치는 건 저출산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다. 일찍 결혼해서 애를 많이 낳길 바라는 일본 사회의 기대가 깔려 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첫째 아이를 낳는 일본 여성의 연령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2013년 전국 평균은 30.4세다. 도쿄는 32.0세로 가장 높다. 초산이 늦어지면 그만큼 출산 횟수도 줄어들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위기감은 크다. 한 여성이 평생 낳는 아이 수를 나타내는 합계출산율은 도쿄가 평균 1.13명이다. 같은 시기 서울은 0.97명, 부산은 1.05명으로 집계됐다. 한국의 저출산은 더 심각하다.

 일본 여성들도 결혼과 출산을 망설이고 있다. 취업을 못하면 결혼을 미루고, 결혼을 해도 일과 육아를 병행할 자신이 없어 임신을 미룬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다 임신 적령기를 놓치는 등의 이른바 ‘사회적 불임’이 많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 여성들이 최근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게 ‘난자 동결’이다. 아기를 갖고 싶지만 당장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고민인 30대 전문직 여성들이 주로 병원을 찾는다. 보통 10개의 난자를 채취해 동결 보관하는데 100만 엔(약 900만원)의 비용을 쓴다. 젊고 건강할 때 난자를 채취해 보관하면 45세 정도까지는 언제든 임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결 난자를 이용한 체외수정의 임신 성공률은 일본에선 아직 10% 정도다.

 지바(千葉)현 우라야스(浦安)시는 지역 내 거주하는 여성의 난자 동결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마쓰자키 히데키(松崎秀樹) 시장은 “여성의 ‘사회적 불임’을 해결하기 위한 긴급 대책”이라고 말했다. 우라야스시 합계출산율은 도쿄보다 낮은 1.11명으로 인구 늘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애를 낳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준비만 해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논란은 뜨겁다. 일본에선 2007년 항암제 치료로 배란이 어려워지는 미혼 여성환자를 위해 임상 연구가 시작됐다. 그런데 건강한 여성들까지 일 때문에 난자 동결에 나서는 건 문제라는 지적이다. 고령 출산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있다. 반면 어쩔 수 없이 임신을 미루는 여성의 사정도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 역시 만만치 않다.

 한국에서도 난자은행이 속속 문을 열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시술 과정의 안전성을 높이고 난자의 보관·폐기에 대한 명확한 규정 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 시급한 건 여성들이 일 또는 아기,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당하지 않고 둘 다 병행할 수 있는 사회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