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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잉에 밀려난 장칭, 야반도주하듯 상하이 ‘탈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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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호 29면

1967년 1월, 신화통신사를 방문한 중앙문혁 조장 천보다(왼쪽 두 번째)와 부조장 장칭(왼쪽 세 번째). [사진 김명호]
백악관 공연을 마친 왕잉(오른쪽)과 일리노어 루즈벨트. [사진 김명호]

1936년 상하이의 연예계는 왕잉(王瑩·왕형)의 해였다. ‘싸이진화(赛金花·새금화)’에서 주역을 따낸 왕잉의 인기는 화려한 도시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무대뿐만이 아니었다. 여배우들이 군침을 삼키던 미남배우 진산(金山·김산)의 연인 자리도 꿰찼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28>

양지가 있으면 응달도 있는 법. 왕잉의 명성이 치솟을수록 경쟁자 란빈(藍蘋·남빈)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여론도 가혹했다. 연일 란빈의 남성 편력을 보도했다. 현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정협 주석인 류정셩(兪正聲·유정성)의 부친인 신중국 초대 톈진(天津) 시장 황징(黃敬·황경)과 영화평론가 탕나(唐納·탕나) 등 수많은 남성들의 이름이 삼류 잡지를 장식했다.

1991년 여름, 서울을 방문한 여류화가 위펑(郁風·욱풍)은 몇 개 월 전 제 손으로 삶을 마감한 장칭(江靑·강청)을 회상했다. 장칭이 란빈이었던 시절, 두 사람은 한방에서 하숙한 적이 있었다. “여론이 악화되자, 란빈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자존심은 여전했다. 누가 밥을 사겠다고 하면 오늘은 속이 불편하다며 사양했다. 사과를 좋아했지만 과일가게를 그냥 지나치는 말이 많았다. 부도덕한 여자라며 손가락질을 받을수록 맷집도 단단해졌다. 내놓고 영화감독 장민(張泯·장민)과 동거에 들어갔다. 장민에게는 사오쿤(蕭棍·소곤)이라는 예쁜 부인이 있었다. 이혼당한 사오쿤은 오빠 사오싼(蕭三·소삼)이 있는 옌안(延安)으로 갔다.”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사오싼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친구였다.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영광스럽게도 마오쩌둥과 초등학교와 사범학교를 함께 다녔다. 마오가 만든 학회에도 참여했고, 베이징과 상하이 시절도 고난을 같이 나눴다. 내가 프랑스 유학을 떠나는 날에도 직접 부두에 나와 이별을 슬퍼했다”로 시작되는 ‘마오쩌둥 동지의 청소년 시절’이라는 저술을 남길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다. 친정 오빠를 만난 사오쿤은 신세타령부터 늘어놨다. 란빈의 이름이 빠질 리 없었다.

장칭은 자신의 과거를 모르는 소년들을 좋아했다. 베이징 최대의 홍위병 조직을 이끈 리둥민(李東民·왼쪽)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줬다. [사진 김명호]

마오쩌둥과 한담을 나누던 사오싼이 상하이의 연예계 얘기를 꺼냈다. 란빈의 스캔들이 화제에 올랐다. 호기심이 많은 마오는 어떤 여자인지 한번 보고 싶었다.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1년 후, 제 발로 옌안에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1937년 7월 항일전쟁의 막이 올랐다. 상하이의 연예인들은 들썩거렸다. 구망연극대(救亡演劇隊)를 결성해 전선으로 나갔다. 그래야 사람 대접을 받았다. 왕잉도 진산과 함께 전쟁터로 향했다. 란빈도 짐을 꾸렸다. 이집 저집 다니던 청소부가 구술을 남겼다. “그날따라 란빈의 방안이 어수선했다. 커다란 가방이 있는 것을 보고 이사라도 가는 줄 알았다.”

란빈은 청소부에게 사정을 털어놨다. “나의 무대 생활은 끝났다. 상하이는 더 이상 내 몸을 숨길 곳이 없다. 먼 곳으로 갈 생각이다. 멀리 가서, 높은 하늘 보며 살고 싶다. 비밀을 지켜주기 바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묻는 사람이 있거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해라. 어두워지면 소리 없이 이 도시를 떠나겠다.” 란빈은 청소부가 만들어준 볶음밥을 먹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란빈의 실종은 큰 얘깃거리가 못됐다. 며칠 수근거리다 금새 수그러들었다.

란빈은 시안(西安)의 팔로군 연락 사무소를 찾아갔다. 사무소 책임자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를 대신해 부인 덩잉차오(鄧潁超·등영초)가 란빈을 심사했다. 십여년 후, 국가원수와 총리 부인으로 등장할 여인들의 첫 대면은 싱거웠다. 란빈은 “칭다오 대학 도서관 직원 시절, 황징의 소개로 입당했다”며 자신의 사진첩을 공손히 건넸다.

덩잉차오는 저우언라이와 함께 상하이의 지하공작을 지휘한 적이 있었다. 란빈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긴 말을 나누지 않았다. 사진첩과 란빈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배우였군” 한 마디 하고는 바쁘다며 자리를 떴다.
란빈은 초조했다. 팔로군 연락 사무소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전 중공 총서기 친팡셴(秦邦憲·진방헌)의 심사를 통과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천팡셴은 첫 번째 남편(실제로는 두 번째) 황징과 가까운 사이였다.

심사를 마친 란빈이 옌안에 도착할 무렵, 왕잉은 홍콩과 베트남, 싱가폴, 말레이시아를 오가며 화교들에게 의연금을 모금했다. 여자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진산과 결별하고 명문장가 셰허껑(謝和庚·사화경)과 정식으로 결혼식도 올렸다.

저우언라이는 왕잉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국제사회에 중공의 대일 항전을 선전하라”며 미국행을 권했다. 미국에 안착한 왕잉은 펄 벅의 도움을 받았다. 예일대학을 마치고 던컨 무용학원에서 자태를 뽐냈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일리노어 부부는 왕잉의 노래를 좋아했다. 백악관에 삼부요인들 모아놓고 왕잉의 강연과 노래를 청할 정도였다.

옌안 생활을 시작한 란빈은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했다. 지난날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이름부터 장칭으로 바꿨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혁명성지건 뭐건, 옌안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전 남편 황징과 잘 안다며 반가워하는 주책 바가지가 한둘이 아니었다. 천보다(陳伯達·진백달)가 특히 심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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