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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우리나라 역사 빛낸 9명의 명장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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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공민우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것을 기념한 ‘의병의 날’이 6월 1일입니다. 남북간 전쟁이 발발한 6·25도 잊어선 안 되겠죠. 수많은 전쟁과 외세의 침략마다 나라를 지켜온 역사 속 명장을 만나봅니다.

10배 넘는 적 격파, 혼자 성 함락…
나라의 위기엔 명장 있었다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한 말입니다. 고조선 시대부터 북한과 휴전 중인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숱한 전쟁과 전투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고비를 넘기고 나라를 지켜왔죠. 6월은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소중은 우리나라 역사 속 명장 9명의 활약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울돌목에서 벌어진 명량해전을 묘사한 기록화 『십경도』의 한 장면. 이순신 장군은 지형과 조류의 변화를 이용해 일자진을 펼쳐 133척의 왜선을 격퇴했다.

명장(名將)은 이름난 장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들은 개인의 뛰어난 무력이나 탁월한 지휘력으로 군사를 이끌어 전투에서 승리한다. 각종 역사서에 기록된 명장들의 활약은 가히 눈부시다. 불리한 상황에서 기발한 전략으로 큰 승리를 거두거나, 적은 병력으로 압도적인 규모의 군대를 이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많은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명장도 그만큼 많다. 중국·일본 같은 주변 국가의 침략도 자주 받았던 우리의 역사에서는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해낸 명장의 활약상이 한층 돋보인다. 군사적으로 열세(상대편보다 힘이나 세력이 약함)에 놓였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맞서 싸워서다.

명장들의 유형은 다양하다. 왕이 직접 전투에 나가 활약하는 경우도 있고, 장수가 전쟁에서의 공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우는 일도 있다. 만화에 나올 법한 엄청난 무력을 뽐내며 역사에 남은 명장도 있고, 장렬하게 전사하거나 혹은 전쟁에선 승리했지만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모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동북아시아 패권을 장악한
한국사 최고의 정복왕

일명 광개토대왕.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삼국시대에 태어나 고구려 19대 왕으로 즉위한 후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한 명장이다. 1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사망하기까지 22년 동안 고구려와 이웃한 모든 세력과 전쟁을 벌였다. 그의 활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국제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는 큰아버지인 소수림왕과 아버지 고국양왕이 기초를 세운 고구려의 국력을 바탕으로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고구려는 서쪽에 후연, 남쪽에 백제, 서북에는 거란, 동북엔 동부여가 자리 잡은 한가운데 위치해 불안한 정세를 이어갔다. 12세의 나이에 태자가 된 담덕은 18세에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전쟁터로 나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원년 가을 7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해 10성을 무너뜨리고 9월에 북으로 거란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이 된 지 2달도 안 돼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쳐 승전을 거둔 것이다. 이후 광개토왕 6년에는 요동성을 점령하고 요동(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동남부 일대)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다. 8년엔 요동의 반대편인 동북방쪽에 군사를 파견해 숙신족 세력을 정벌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서기 400년에는 후연과의 전쟁에 집중했다. 약 5년 동안 요동의 패권을 두고 후연의 왕 모용성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401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을 받아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왜(일본)를 몰아내 남쪽을 안정시켰다. 즉위 내내 거의 쉼 없이 전쟁을 벌여 광대한 영토를 구축하고 나라를 지켜낸 정복왕의 모습을 보였다.

화랑 정신으로
삼국을 통일한 명장

신라의 명장으로 세 나라를 통일하고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 삼국시대 최고의 영웅으로 꼽힌다.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해·달 등 일곱 별의 정기를 받아 등에 ‘칠성’ 무늬가 있다는 탄생 설화가 나온다.

15세(609년) 때 화랑이 돼 ‘용화향도’라는 무리를 이끌었고 이후 중악산(지금의 경주 단석산으로 추정)에 들어가 검법 수련을 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는 중악산에서 수련할 때 난승이라는 노인에게서 삼국을 통일할 비법과 무술을 배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611년 수련을 마친 후 화랑의 대표격인 ‘국선’으로 승격했다. 젊은 시절 기생인 천관녀를 사귀었으나, 어머니가 꾸짖자 다시는 기생집에 출입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는 데 온 힘을 쏟기로 맹세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김유신을 태운 말이 천관녀 집에 찾아가자 말의 목을 베어 죽이고 돌아와 맹세를 지켰다는 설화가 전한다.

629년엔 고구려와의 전쟁에 출전, 낭비성 전투에서 홀로 적장을 3명이나 베기도 했다. 이후 백제 원정군의 최고지휘관이 되는 등 장군으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649년에는 대대적으로 침입해 온 백제군에 맞서 지휘관급 100명과 군졸 89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말 1만 필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부하들을 결속시키는 명장이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행군하던 군사들이 지치자 어깨를 드러낸 채 앞장섰다는 일화,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군에게 패배하고 도망해 오자 왕에게 참수형을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일화도 유명하다. 660년에는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한 공로로 신라 최고의 벼슬인 태대각간에 올랐다. 흥덕왕(재위 826~836) 대엔 ‘흥무대왕’으로 사후추존(죽은 뒤 높이 받들어 올림)되어 왕의 지위를 얻었다.

한국판 ‘300’ 찍은
황산벌의 영웅

김유신의 라이벌이자 백제의 마지막 명장이다. 황산벌(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의 평야)에서 5000명의 병력으로 김유신의 5만 대군을 4차례나 막아낸 ‘대김유신 전용 결전병기’라 할 수 있다.

계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황산벌 전투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알기 힘들다. 다만 『삼국사기』 계백열전에 따르면 그는 ‘달솔’이라는 벼슬을 받아 살았다고 전해진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로 쳐들어오자 그는 죽음을 각오한 5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했다. 전쟁에 나아가기에 앞서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 수 있으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는 것만 못하다”며 아내와 자식을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다짐했다.

백제 황산벌 전투 재현 행사

계백의 결사대는 황산벌 인근의 3곳에 진지를 구축해 방어에 나섰다. 평지에서 10배가 넘는 적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험준한 지형에 진지를 세운 것이다. 그는 지형을 활용해 병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했다. 그 결과 연합군 5만 명은 5000명을 상대로 어려운 싸움을 겪었다. 계백의 결사대는 엄청난 용맹을 뽐내며 계백은 연합군과 벌인 4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10배가 넘는 병력의 차이는 그도 어쩔 수 없었다. 4번의 전투로 지친 백제군에게 5번째의 전투는 무리였다. 결국 계백은 마지막 전투에서 결사대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그 모습은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상대로 싸운 레오니다스왕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시대의
소드 마스터

여진족을 상대로 뛰어난 무술 실력을 선보인 고려시대의 무장. 칼 한 자루를 들고 홀로 수십·수백 명의 적을 베어 넘기는 판타지 소설 속 ‘소드 마스터’와 같은 활약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정확한 출생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그의 이름은 1104년 2월 여진족이 고려 정주성을 침공했을 때부터 기록되기 시작한다. 하급관리인 별가 직책이었던 그는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임간에게 “말 한 필과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상황이 워낙 불리했기 때문에 이 건방진 행동은 간신히 수락될 수 있었다. 척준경은 홀로 적진에 돌격해 적장 2명을 죽이며 여진족을 몰아냈다.

이후 척준경은 장군 윤관을 따라 여진족 정벌에 참여해 믿기 힘들 정도의 전과를 세웠다. 여진족이 성을 쌓고 윤관의 고려군에 대항하자 그는 칼 한 자루와 방패 하나를 들고 혼자 쳐들어가 성을 함락시켰다. 또 윤관이 여진족에게 사로잡혔을 때는 부하 10명과 특공대를 조직해 1000명의 여진족을 상대로 싸워 윤관을 구출하기도 했다. 놀라운 점은 이런 기록들이 야사(민간에 떠도는 역사)가 아닌 정사(정통적인 역사 체계에 의해 서술된 역사)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척준경의 용맹은 고려 인종 시대에 반란을 일으킨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인종과 함께 궁을 나서던 그는 이자겸의 반란군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고함을 지르자 반란군들이 그대로 굳어버렸다고 한다. 칼을 뽑아 고함치며 돌진하는 활약 끝에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는 성과를 거뒀다.

다만 그는 한때 이자겸과 함께했다는 이유 등으로 1127년 직위를 박탈당하고 귀양을 간다. 17년 후 다시 벼슬을 받고 돌아왔으나 곧 병으로 사망한다.

신궁이라 불린
조선의 건국왕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사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강의 맹장(용맹한 장수) 중 하나다. 30년 동안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이성계가 무관으로 활동했던 시기는 고려 말, 주변 국가의 혼란이 극에 달한 때였다. 그는 게릴라전이나 수비전을 펼치는 대신 기병을 이끌고 벌판에 나아가 원나라군벌·여진족·왜구·홍건적 등 당시 동아시아에서 싸울 수 있는 적이란 적은 모두 물리친 전설적인 무장이다.

그는 아버지인 이자춘과 함께 1356년 쌍성총관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 이북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된 관부) 공격에 참여했다. 그의 특기는 활쏘기다. 활을 잘 쏴서 ‘신궁’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실제 1357년부터 70년까지 펼쳐진 제1차 요동정벌 전투에서 이성계는 말을 타고 적진 근처로 달려가 애기살(군용으로 사용된 화살의 한 종류)을 꺼내 적군 70여 명의 머리를 맞히는 경악스러운 활약을 선보였다. 또 채명이라는 적의 장군을 설득하기 위해 말을 타고 활을 쏴 채명의 말을 죽이고 무기를 날려버렸는데, 이때 채명이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자 먼 거리에서 그의 허벅지를 활로 맞히는 솜씨를 선보여 질리게 만들어 항복시켰다.

1380년에는 황산(현 전라북도 남원 인근)에 침략한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1년에 15~20차례씩 쳐들어오는 왜구들은 당시 고려에게 심각한 위협이었다. 『고려사절요』에는 왜구 때문에 지방의 세미(세금으로 내는 쌀)가 걷히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때 이성계는 적장인 아지발도의 투구꼭지를 쏘아 맞히며 왜구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고,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런 활약으로 이성계는 고려 내에서 세력을 키우고 조선을 건국할 기반을 다지게 된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조선 바다의 수호신

임진왜란에서 거북선을 이끌고 왜군을 물리친 명장이다. 그는 다소 늦은 나이인 22세 때 처음으로 무예를 배워 32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징조가 보이자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이순신을 외침을 막는 관직인 수군 만호에 임명한다. 탁월한 능력으로 업무를 수행하면서 47세의 나이에 수군절도사(수군의 총지휘관)에 올랐고, 다가올 전란에 대비해 실전과 동일한 수준의 훈련을 했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 불리는 거북선도 이때 만들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옥포만(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시 인근)에 출전해 도도 다카도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전멸시켰다. 7월에는 왜선 수십 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섬멸하는 한산도대첩을 이끌었다. 적을 포위해 물리치는 진형인 ‘학익진’을 활용해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었고, 거북선의 활약도 한몫했던 전투다.

이후 그는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크게 패한 이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돼 전투에 나섰다. 이순신은 1597년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명량해협에 나아가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 배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배를 일자로 길게 늘여 세우는 진형인 ‘일자진’을 펼쳐 명량의 좁은 지형과 조류(바닷물의 흐름)를 이용해 적을 물리쳤다.

명량대첩의 패배로 전쟁을 진행할 힘을 잃은 왜군은 이듬해인 1598년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를 놔둘 수 없었던 이순신은 노량해협에서 적을 추격해 많은 왜군을 섬멸하는데 성공했지만 안타깝게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그는 나라를 지켜낸 영웅으로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다.

진주대첩에서 활약한
심리전의 달인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한 명장이다. 1592년 음력 10월, 왜군은 하세가와가 이끄는 3만 명의 대군을 진주성(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으로 보내 성을 공격하게 했다. 당시 진주목사였던 김시민은 3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방어에 나섰다.

그는 전라 의병장 최경회와 경상 의병장 곽재우에게 구원을 요청해 성의 방어를 강화했다. 음력 10월 6일, 3만 명의 왜군이 성을 포위했지만 성 뒤의 조선 의병군이 왜군을 위협하고 있어 바로 공격할 수 없었다.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시민은 백성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성 위에 깃발을 세워 병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는 심리전을 펼쳤다. 의병군도 왜군의 뒤에서 피리를 불며 심리전에 힘을 보탰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운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

다음 날인 7일에도 왜군의 공세는 이어졌다. 총을 쏘면 대포를 발사하는 식으로 왜군의 공격을 막아내던 김시민은 밤이 되자 악공(음악 연주를 담당한 전문음악인)을 불러 거문고와 퉁소를 불게 하며 심리전을 펼쳤다. 왜군이 성벽에 접근하면 돌을 던지고 화살을 쏘며 끈질기게 막아냈다.

6일 동안 펼쳐진 치열한 전투 끝에 왜군은 1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는 등 큰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진주성에서의 전투는 일본 수군과 육군의 연결을 끊어버리고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줬다. 이 공방전의 주역인 김시민은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중 사망한다.

청산리전투의 승리 이끈
독립군 장군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군을 이끌며 일본군을 격파한 명장이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은 더욱 활발해졌고, 이에 대한 일본의 탄압도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김좌진은 1918년 만주에 망명해 독립군에 참여한 후 북간도 지역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군을 이끌며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에 나섰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만주 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해 일본군을 섬멸한 싸움이다. 청산리 계곡은 약 25㎞의 길이로 늘어진데다 좌우에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있어 병력을 숨기기 좋은 지형이었다. 김좌진은 여기에 병력을 숨겨 길을 지나던 일본군을 공격해 200명을 사살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

1921년 청산리전투에서 사용됐던 독립군의 무기류.

이후 김좌진은 일본군을 추격하는 대신 갑산촌이라는 마을로 철수했다. 일본군과 싸워 발목을 잡고, 추격해오면 다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일종의 작전이었다. 작전 도중 인근 마을에 일본군 1개 기병 중대가 야영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군을 포위 공격해 120여 명을 사살했다. 23일에는 독립군을 추적해오는 일본군과 전투를 펼치며 또 다시 전과를 올렸다. 그 결과 수많은 일본군들이 독립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제출된 보고서에 따르면 독립군은 6일 동안의 전투를 통해 약 1000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공을 세웠다.

한국전쟁서
하늘을 지킨 참군인

이세영 공군소령은 6·25 전쟁의 영웅이다. 북한에서 태어나 평양 제3국립중학교를 다니다 일본 다찌아라이 육군비행학교에서 조종사 교육을 받은 그는 처음엔 북한에서 공군 중위로 복무했다. 그러던 중 숙청대상으로 몰려 자유를 찾아 1948년 대한민국으로 내려왔다. 이후 대한민국 육군 항공사령부에 입대해 새 출발을 하게 됐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나라를 위해 전투기를 타고 하늘로 출동했다. ‘L-4 연락기’를 타고 적진을 정찰하는 임무를 60여 번이나 수행하며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큰 공을 세웠다. 폭탄과 수류탄으로 적의 지상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덕분에 1951년 3월에 대위로 진급, ‘F-51 전투기’를 타고 본격적인 전투에 나설 수 있게 됐다.

1951년 을지무공훈장을 받은 이세영 소령. 그는 책임감이 강하고 임무 수행에 투철한 장교였다.

전투기 조종사와 정비사 20명으로 창설된 소수 정예 부대인 ‘백구부대’에 소속된 그는 전투기를 끌고 14번 출격해 트럭 42대와 보급품 집적소 11개소를 파괴하고 군용건물 44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안타깝게도 15번째 출격에서 불행이 닥쳤다. 적을 공격하던 중 적의 포탄에 전투기가 부서져 기지로 돌아올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적진에 돌입하려 함. 굿바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전투기의 날개를 두 번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적의 보급품을 쌓아둔 곳으로 돌진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사하는 순간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방법으로 적에게 피해를 안긴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명장을 있게 한 인물

김춘추(604~661년) 김유신이 삼국을 통일할 수 있도록 한 중심인물이자 신라의 제29대 왕이다. 『삼국사기』에는 ‘풍채가 매우 특이했는지 당 태종이 그를 보고 매우 기이하다고 평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담소를 잘했다’고 적혀 있다. 사람을 끄는 외모와 언변의 소유자답게, 그는 왕이 되기에 앞서 뛰어난 외교가로 활약했다.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고구려와 왜, 당나라 등을 오가며 활발한 외교를 펼쳤으며 진덕여왕을 도와 왕권을 강화하는 제도도 만들었다. 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60여 개조의 법제를 정비해 신라 역사상 가장 왕권이 강했던 시기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이지란(1331~1402년)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원래는 여진족 출신으로 ‘퉁두란’으로 불렸다. 젊은 시절 이성계와 처음 만났을 때 잡은 사슴을 두고 다투다가 활쏘기로 승부를 가렸다는 일화도 있다.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성계가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묘기를 선보였다. 이에 감탄해 의형제를 맺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고려에 귀화해 이씨 성을 받고 이성계를 따라다니며 공을 세웠다. 활솜씨도 뛰어났다. 이성계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적장의 투구꼭지를 맞혀 투구를 떨어뜨리자, 이지란이 화살을 연이어 쏴 적장의 얼굴에 명중시킬 정도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1등 개국공신으로 대우받았다.

류성룡(1542~1607년) 조선 선조 때의 재상으로,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일등공신이다. 이순신과는 꽤 친밀한 사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류성룡과 서신(편지) 교환을 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직전 류성룡이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법서를 이순신에게 보내 실전에 활용하게 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으로, 군사적 안목도 뛰어나고 외교나 인재 등용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임진왜란의 지휘와 뒷수습에 많은 공을 세웠고 훈련도감을 창설해 조선 군사체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징비록』을 저술하기도 했다.

글=김록환 기자 rokany@joongang.co.kr, 일러스트=공민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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