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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직격 인터뷰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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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성룡 기자 중앙일보 사진기자
이원종 전 수석은 “정치인들이 비전을 내놓고 국민이 이해하도록 소통해야 한다”며 “어려움을 호소해 같이 극복하도록 하는 게 정치”라고 강조했다. [김성룡 기자]

김영삼 정부의 ‘실세’ ‘부통령’으로 불렸던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최근 『국민이 만든 대한민국』(메디치·사진)이란 책을 냈다.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의 헌정사를 해부한 살아 있는 정치교과서다. 현실 정치인으로서 경험한 풍성한 경륜과 학문적 토대에 기초한 날카로운 분석이 조화를 이룬다. 재야 운동을 포함해 24년을 정치 현장에서, 이후 15년을 정치학자로 살아온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목마른 사람이 샘 파야 … 박 대통령, 아니꼬와도 야당 껴안아라”

이 전 수석은 대한민국의 정치사를 ‘국민중심론’으로 요약했다. 그는 “정치인이나 관료는 자기들이 잘나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됐다고 착각한다”며 “위대한 나라가 된 건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현명함, 위기에 빛을 발하는 공동체 의식으로 무장한 국민의 탁월한 역량 때문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민이 우리가 잘난 민족이란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정치 지도자들에겐 국민을 떠나서는 좋은 정치가 나올 수 없다는 걸 일깨워주고 싶었다”고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인터뷰는 지난 25일 중앙일보사에서 진행됐다.

 -책의 부제를 ‘잘난 국민, 못난 정치 지도자들’로 붙였다.

 “1948년 개국한 대한민국은 미국에 의해 민주주의를 배우면서 실천했다. 첫 선거인 48년 5·10 총선 때 문맹률이 75%였다. 자기 손으로 지도자를 뽑는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국민이었지만 불과 12년 만에 기본권이 침해됐다며 4·19를 일으켰다. 이건 인류역사상 아주 큰 사건이라고 본다. 세계에 이런 나라, 이런 국민이 없다. 우리 국민이 위대하다고 보는 이유다.”

 -역대 선거를 분석해 대한민국을 선거와 항쟁의 역사라고 정의했다.

 “국민이 중요할 때 선거와 저항을 통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이승만 패러독스’라고도 불리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을 만들어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해 대통령이 됐다. 이것이 국민에게 민주주의 의식을 심어줬고, 그 결과 4·19가 일어나 물러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화당을 만들어서 완벽하게 대선 준비(63년)를 했는데 야당 후보로 윤보선 등 7명이나 나왔지만 2위와의 표차가 15만 표밖에 안 났다. 5·16 쿠데타를 국민이 승인한 선거라고 볼 수 없다는 얘기다. 87년 대선 땐 당연히 민주화가 됐어야 하지만 쿠데타의 주역 중 한 명인 노태우가 당선됐다. 30년 넘는 세월을 군사 권위주의적 통치하에서 지내면서 정당성 여부를 떠나 안정감을 느껴온 국민이 양김(兩金)을 보니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3대 총선 때 여소야대를 만들어 노 대통령이 맘대로 할 수 없도록 했다. 국민이 탁월한 선택을 한 거다.”

 -그런 힘과 역동성이 어디서 나온다고 보나.

 “왕조시대에 백성은 국가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지 못하고 수탈의 대상이었다. 삶의 환경이 척박하니까 국가만 믿지 않고 자기가 살길을 찾아왔고 오랜 역사 속에서 자생력이 만들어졌다고 본다. 같은 DNA를 갖고 있지만 북한처럼 지나치게 통제를 하면 그런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자율적 의사결정권이 부여된 환경에서 역량이 극대화돼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전 수석은 한국민의 기질을 ‘국민 중심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국민의 특성을 ▶저항을 통해 자유를 체화하고 순응하며 ▶한(恨)은 신명의 근원이 되고 신명은 발전의 동력이 되며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변화를 수용하되 창조적 발전으로 승화시킨다고 설명했다.

 -국민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한인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의 아줌마들이 시작했다. 요즘처럼 교통·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지만 3·1 운동엔 인구 3000만 명 중 1000만 명이 참가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당시 금 모으기 운동도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국가위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가 있는 거다.”

 -국민을 신명 나게 하는 게 좋은 정치라고 했는데.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가 우리의 역량, 한(恨)과 신명을 보여줬다. 한은 산업화까지는 가능하나 선진화까지 가려면 신명 나게 해줘야 한다. 국민을 신명 나게 해주면 금방 선진국 수준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정치가 신명 나게 하는 게 아니라 짜증 나게 하니 문제다.”

 -신명 나게 하는 정치가 뭔가.

 “정치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국민을 상대로 설득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정당은 자기들끼리 싸움박질하느라 바쁘고 국민 소통 기능을 안 하고 있다. 정당 밖은 다원화·민주화되고 있는데 정당은 민주적 의사결정을 따라가는 구조가 안 돼 있다.”

 -포퓰리즘과는 다른가.

 “포퓰리즘은 국민의 비이성적 요구를 쫓아가는 것이다. 히틀러의 나치가 성공한 건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 국민이 당한 한과 설움을 이용한 것이다. 한의 정치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한을 이용하려고 한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 추모식에서 아들과 친노들이 보인 행태도 그런 거다. 자기 책임에 대한 의식은 없고 상대방, 자기를 박해한 사람들에 대한 한만 잔뜩 남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신명 나게 하는 리더십인가.

 “박근혜 리더십의 문제는 국민을 배제하는 데 있다. 아버지 시대는 지도자가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국민이 따르는 권위주의 통치 방식이 가능했고 통했다. 지금은 다르다. 대통령이 무슨 수로 엄청나게 크고 복잡해진 국민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나. 불가능하다. 맨날 수석들에게 지시하고 야단치는 걸로는 국민이 납득을 못한다. 국민과 직접 대화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개혁의 화두는 잘 잡았다. 비정상의 해악은 기득권자 때문에 생기는 거다. 박 대통령이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청와대의 비정상화부터 해소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비서 세 사람(정호성·이재만·안봉근 비서관 지칭)의 도움 없으면 누구하고 일하겠느냐고 했잖나. 그 얘기 듣고 아마 수석·장관들이 제일 불편했을 것이다. 그런 비정상적인 사고를 나의 ‘백’은 국민에게 있다는 정상적인 사고로 바꿔야 한다. 큰 걸 하려면 세 사람부터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박 대통령도 늘 ‘국민’을 강조한다.

 “소통이라는 건 결국 목마른 사람이 샘 파는 거다. 자기가 생각하는 비전을 60%든 70%든 실현하려면 더럽고 아니꼽더라도 끌어안아야 할 것 아닌가. 내 생각이 옳은데 왜 몰라주느냐고 하고 야단칠 일이 아니라 도와 달라고 호소해야 한다. 그런데 야당은 물론 여당까지 짓밟아서 되겠나.”

 -당·청 관계를 비관적으로 보는 것 아닌가.

 “지금의 당·청 관계는 건강하지 않다고 본다. 공무원연금법 개정과 관련해 조윤선 정무수석의 사표를 받으면서 ‘야당과 정치권에 대한 경고’라고 했던데 제 얼굴에 침뱉기다. 대통령이 쓰고 싶은 비서니까 바꾸는 건 좋은데 책임을 물어 내보낸다는 게 말이 되나. (일을 추진하다) 안 되면 책임은 (대통령) 자신한테 있는 거다. 경고할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을 털어놓고 협조를 구하고 대안을 내놓고 얘기해야 할 것 아닌가.”

 -여당이 잘못 가고 있을 때 대통령도 의견을 표명할 수 있지 않나.

 “설사 청와대가 옳다 하더라도 그렇게 접근하면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국민에겐 새누리당 지도부를 야단치는 걸로 비친다. 당을 국민 생각 안 하는 곳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지 않나. 대통령이 잘못하면 새누리당도 차기 총선, 대선에 영향 있으니까 함부로 대들지도 못하고 수용하기도 힘들고 갈등이 많을 거다. 정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통합을 이루느냐가 중요하다. 야당에도 대통령 생각을 이해시켜야 한다. 야당에 저자세로 나가는 건 국민을 상대로 호소하는 것이다. 국민과 함께한다는 생각을 안 하고 내가 옳으니 따라오라며 가르치고 통치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게 문제다.”

 -지금까지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해 10명의 대통령이 나왔다. 국민 사이에 ‘ 대통령들은 실패했다’는 회의론이 퍼져 있다. 이 에 동의하나.

 “동의 못할 점이 많다. 중국의 덩사오핑은 마오쩌둥에게 정치적으로 핍박을 당했지만 ‘공(功)은 7이고 과(過)가 3’이라고 정리했다. 그걸로 중국 국민의 자존심을 살려준 거다. 우리 대통령들도 완성은 안 됐지만 시대적 요구에 맞춰 어젠다를 제시하고 그 역할과 소명을 다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공과가 다 있다. 하나회 정리 등 군사문화를 제거해 문민화 작업의 기초를 다진 건 김영삼(YS) 대통령의 업적이다. 문민화가 됐기 때문에 김대중(DJ)이라는 진보적 정권이 나올 수 있었다. 개혁은 힘있는 소수를 상대로 하는 것인데 그 사람들의 저항이 제일 무섭고, 성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다. 반면 개혁의 혜택을 보는 힘없는 다수는 그걸 잘 모른다. 그러나 IMF로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준 점, 김현철씨 구속으로 국민을 실망시킨 건 과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탈(脫)권위주의라는 시대적 소명이 있었고 국민참여시대를 여는 역할을 했다. 국민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건 리더들의 책임이 크다.”

 -한국 정치가 후진성을 왜 면치 못할까.

 “정치가 권력의지만 있지 권력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다.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데 진영논리가 이념과 신념에 의해 나눠진 것인지, 구체적 정책에서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진보와 보수가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 권력추구를 위한 패거리 싸움만 남아 있는 것 같다. 보수는 기득권에 도취돼 스스로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데 개혁 없는 보수는 살아남을 수 없다. 진보도 분명하게 이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진영논리는 패거리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남의 약점 잡아 정치할 생각 말고 자기 비전을 분명히 하고 국민에게 협력해줄 것을 설득하는 리더십이 나와야 하는데 요즘 이런 정치인이 없다. 자기 의식이 분명치 않은 사람이 권력추구만을 위해 정치하는 게 아닌가 싶다. 곧 국민에게 혼이 날 것이다. 지역주의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과제지만 어려우니까 쉬운 것, 국민에게 아양 떠는 걸로 나간다. 복지, 복지 하는데 자기 돈이면 그렇게 쓰겠나. 어려움을 호소해 같이 극복하도록 하는 게 정치지 투정하는 사람들 비위 맞추는 것은 포퓰리즘이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협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국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다. 그래서 책을 쓴 거다.”

이정민 정치·국제에디터 겸 논설위원
사진=김성룡 기자

이원종 전 수석은 …

김영삼 대통령의 정무수석 시절 그는 ‘혈죽(血竹)선생’으로 불렸다. YS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하면 곧잘 핏대를 세우곤 하는 불같은 성격에 빗대 기자들이 붙인 별명이다. 그는 꼿꼿한 성품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고려대 3학년 때인 1972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維新)발표를 보고 “한 사람이 두 번 쿠데타 할 수 있느냐”며 분개해 정치판(신민당)에 뛰어들었다. YS의 공보비서로 출발해 청와대 수석을 마칠 때까지 24년 동안 YS 곁을 지켰지만 YS의 임기가 끝나자 정치에서 발을 끊었다. YS는 퇴임 후 "국회의원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이 전 수석이) 사양하더라. 그런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다.

 2000년 고려대 정치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2005년엔 한양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요즘은 인하대(초빙교수)·한양대(언론정보대학 특임교수)에서 정치학을 가르친다. 이 전 수석은 늦깎이 공부를 시작한 데 대해 “정당이 바로 돼야 한국정치가 바로 된다고 생각해 공천 개혁과 민주화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