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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10명 중 7명 "원치 않는 임신일 땐 낙태"

중앙일보

입력

한국 여성 10명 중 7명 이상은 원치 않는 임신을 할 경우 낙태를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은 10명 중 6명 이상이 같은 생각을 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동식 연구위원이 지난해 여성 1007명과 남성 201명을 대상으로 피임과 낙태에 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다. 현행법상 낙태는 임신이 산모의 건강을 해치는 경우 등 특별한 사유를 제외하고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김 위원은 현행법에서 허용하지 않는, 사회·경제적 이유로 낙태해야 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낙태 의향을 물었다. 여성 1007명 중 762명(76.2%), 남성은 200명 중 131명(65.2%)이 낙태하겠다고 답했다. 같은 사회·경제적 이유라 하더라도 그 내용에 따라 낙태 의향은 다르게 나타났다.

'미혼인데 임신한 경우'에 대해서는 남녀 모두 낙태 의향이 가장 높았다. 여성 73.4%와 남성 60.7%가 낙태하겠다고 답했다. '경제 사정이 어려워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데 임신한 경우'는 여성 39.1%, 남성 33.3%가 낙태를 선택했다. '미혼 임신'보다는 낙태 의사가 다소 줄었다. '기혼이지만 학업·직장 생활 등으로 임신 계획이 없는데 임신한 경우'에 대해서는 여성 20.6%, 남성 13.4%만 낙태 의사를 밝혔다.

현실에서 낙태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경우 10명 중 7명은 낙태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 대상 가운데 19세 이상 성인 여성(929명)의 16.8%(156명)가 원치 않는 임신을 경험했다. 여성 6명 중 1명 꼴이다. 원치 않는 임신을 했던 156명 가운데 30.1%(47명)만이 출산을 했고, 나머지 60.9%(95명)는 낙태했다. 9%는 자연유산됐다고 응답했다. 낙태한 95명 가운데 현행법상 낙태를 허용하는 사유에 포함된 경우는 9.5% 뿐이었다. 나머지 90.5%는 허용하지 않는 사유, 즉 불법이었다.

낙태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현행법에 대해 절반 가까운 여성(49.1%)이 반대의견을 냈다. 남성도 47.3%가 반대했다. 특히 뱃속 태아가 장애아인 경우에도 낙태할 수 없도록 한 규정에 대해 여성 62.4%, 남성 60.2%가 반대했다.

낙태가 많은 것은 피임약 복용률이 낮은 것과 관련 있다. 조사 대상자 가운데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피임약을 복용한 적 있다'고 응답한 여성은 31.6%에 불과했다. 그 중에서도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용한 경우는 18.6%에 불과했다. 생리를 미루기 위해서(20.5%)라는 이유가 더 많았다.

국내 한 연구에 따르면 국내 피임약 복용률은 약 2.5%로, 서구 국가의 20~40%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 피임약 복용률은 낮고 낙태율은 높은 실태에 대해 김 위원은 "피임약 복용률이 낮으니 낙태율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낙태를 제한된 범위에서만 허용하는데도 낙태를 포괄적으로 허용하는 국가보다 낙태율이 높고, 국내는 피임약이 일반의약품이어서 접근성이 높음에도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된 국가보다 복용률이 현저하게 낮은 점은 역설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은 피임과 낙태, 출산 정책이 서로 연계돼야 한다는 해법을 내놨다. 그는 "국내에서는 낙태에 관한 결정을 의사 1인인 결정하는 구조인데, 선진국에서는 사회복지사와 상담사를 포함해 2인 이상이 하도록 돼 있다. 경제적·사회적 여건이 안 되더라도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산모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다"고 소개했다.

미혼 여성이 혼외 임신을 알게 된 직후, 흥분된 상태에서는 낙태를 떠올리기 쉽지만 각종 지원책 등 충분한 정보를 접하면 낙태 이외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여성들은 성관계 후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두려움(39.5%)을 느끼고, 우울감(23.6%)과 죽고 싶은 심정(8.1%)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김 위원은 "사회적·경제적 여건이 안 되는 커플이 예상치 않은 임신을 한 경우 일차적으로는 낙태만 생각하기 쉬운데,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도적으로 열어주면 자녀를 낳는 선택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 여성의 출산 건강권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박현영 기자 park.hy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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