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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호 “아버지 유인촌 덕 본다는 소리 싫어 이름 바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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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연극 ‘페리클레스’에서 주인공 역을 나눠 맡은 부자(父子) 배우, 유인촌(위)과 남윤호(본명 유대식).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가로 20m, 세로 35m에 달하는 무대 전체에 50t의 모래가 깔렸다. 그 위에서 폭풍 같은 삶의 역정이 펼쳐진다. 12일 막을 올린 셰익스피어 후기 낭만극 ‘페리클레스’. 티레의 왕 페리클레스는 앤티오크 왕의 속임수에 빠져 쫓기는 신세가 된다. 다소·펜타폴리스·미틸레네 등을 떠돌다 펜타폴리스 왕국의 공주 타이사와 결혼해 딸 마리나를 낳지만 운명의 소용돌이는 여전히 가혹하다. 어마어마한 태풍을 만나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만나기까지, 그래서 “폭풍이 오면 잡을 밧줄이 있고 헤어져도 다시 만날 희망이 있는 것, 그게 산다는 것 아니겠는가”를 깨닫기까지 2시간40분 동안 인생의 파노라마가 박진감 있게 흘러간다.

 주인공 페리클레스를 연기하는 배우는 유인촌(64)·남윤호(31·본명 유대식) 부자다. 젊은 페리클레스는 아들이, 노년의 페리클레스는 아버지가 맡았다. “개인적인 주목을 받고 싶지 않다”며 가족 관계를 쉬쉬 했던 두 사람을 공연이 없는 월요일(18일) 오후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운영하는 서울 청담동 소극장 ‘유시어터’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전화 목소리는 가족들도 분간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비슷하다”고 했다. 닮은 외모와 목소리. 한 인물을 연기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합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과 같이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불편해 출연을 망설였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앞으로 둘이 함께 무대에 설 기회가 별로 없을 테니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캐스팅에 응했다”고 했다.

사진은 공연 장면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들은 영국 로열할로웨이대학에서 영화를, 미국 UCLA 대학원에서 연기를 전공한 뒤 2012년 국립극단 연극 ‘로맨티스트 죽이기’의 코러스로 데뷔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를 숨기며 활동했다. “아버지 덕 본다는 소리 듣기 싫고, 아버지에게 부담 주기도 싫어 이름을 바꿨다”고 말했다. 그의 ‘신분 세탁’에 가족도 동의했다. 예명 ‘남윤호’는 어머니(성악가 강혜경)가 작명소에서 지어온 이름이다.

 연극 ‘페리클레스’는 ‘배우 유인촌’의 주류 무대 복귀작이다. 2004년 서울문화재단 대표로 시작해 2012년 예술의전당 이사장까지 이어진 공직 생활 이후 ‘파우스트-괴테와 구노의 만남’ ‘홀스또메르’에 출연하긴 했지만 주로 지방의 작은 극장에서였다. 예술의전당 무대에 서는 건 2005년 ‘홀스또메르’ 이후 꼭 10년 만이다. 무대와 객석을 장악하는 그의 선굵은 연기는 ‘페리클레스’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정치에 빼앗겼던 그의 배우 인생이 새삼 아까웠다. 그 역시 “공직 8년이 연기자로서는 마이너스였다”고 인정했다. “싫어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적당히 일했으면 욕 먹을 일이 없었을 텐데 성격상 그러질 못했다. 하나를 하면 두세 개로 확대 포장되는 정치적인 반응에 놀라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아들은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때 마음 아팠다. ‘(정치를) 안 하셨어도 좋았을 걸’이란 생각도 해봤다. 나는 배우생활만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극단 여행자 소속인 ‘배우 남윤호’는 세련된 외모와 섬세한 연기로 주목받는 신예다. 데뷔작 ‘로맨티스트 죽이기’를 연출했던 양정웅 극단 여행자 대표를 따라 극단에 들어가 ‘히에론-완전한 세상’ ‘로미오와 줄리엣’ 등에 출연했다. 이번 작품 ‘페리클레스’ 역시 양정웅 대표가 연출한다.

 아들에 대해 아버지는 말을 아꼈다. “배우는 자기 자신의 연기도 마음에 안 든다. 1%가 모자라도 그것만 눈에 들어오니 어쩔 수 없다. 아들에게 연기 이야기는 거의 안 한다. 연습 방법도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호암아트홀에서 공연할 때 연습 끝나면 압구정동 집까지 뛰어가면서 대사를 외웠다”고 슬쩍 흘린다. ‘페리클레스’ 공연은 31일까지다.

글=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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