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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남자가 찍은 자급자족 라이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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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리틀 포레스트2:겨울과 봄’ 모리 준이치 감독

‘리틀 포레스트2:겨울과 봄’(이하 ‘리틀 포레스트2’)이 5월 14일 개봉한다. 지난 2월 개봉한 ‘리틀 포레스트:여름과 가을’(2월 12일 개봉, 이하 ‘리틀 포레스트1’)의 속편이다. 일본의 궁벽한 농촌, 코모리에서 자기 손으로 일군 농작물로 삼시 세끼 제철 음식을 해 먹는 젊은 여성 이치코(하시모토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극적인 전개 없이도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는 희한한 작품이다. 지난 3일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모리 준이치(48) 감독을 햇살이 부서지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훤칠한 키에 흰 피부,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은 남자가 성큼성큼 카페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니까 ‘반쯤은 검게 그을린 시골 농부 같겠지’ 했던 짐작은 착각이었다. ‘리틀 포레스트’ 2부작을 만든 모리 감독은 완벽한 도시 남자였다. 도쿄에서 태어나 평생을 도쿄에서 산, 농사라고는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남자. 흙 냄새보다는 콘크리트 냄새가 친숙한 ‘도쿄 촌놈’이 ‘시골 라이프’가 진수인 동명 원작 만화에 끌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 사람이 시골에 살며 자신이 먹을 것을 직접 기르고 요리해 먹는다는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바로 자급자족 정신이죠. 지금 일본은 그런 정신이 많이 약해졌거든요.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 가면 정말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어요. 손쉽고 편리하죠. 하지만 그렇게 주문한 음식이 공들여 만든 음식보다 더 맛있을 수 있을까요? 너무 편리한 삶은 인간의 본질을 달라지게 한다고 생각해요.”

자급자족이라. 까마득한 시절의 이야기다. 모리 감독은 이 낡은 단어를 현재 일본의 한 시골 마을로 불러냈다. ‘자급자족의 여왕’으로 불릴 만한 이치코는 오로지 삼시세끼를 위해 365일 밭을 일구고, 농작물을 수확한다. 삼시 세끼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므로 이치코는 늘 바쁘다. 모리 감독은 낭만적 자연 풍광과 이치코의 고단한 일상을 교차시킨다.

“저도 촬영하며 농사를 지어봤는데 정말 간단한 일이 아니었어요. 혼자라면 모를까, 가족이 있다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자급자족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했으나 영화를 찍으면서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죠. 우리 모두 자급자족으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어떻게 키워졌는지, 어디에서 배달돼 왔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모리 감독은 영화를 찍고 나서 중학생 자녀에게 “자급자족해볼까”라고 말했다가 단번에 거절당했다고 했다. 대신 아파트 베란다에서 토마토와 파를 기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치코처럼 완전한 자급자족을 꿈꾸면서 말이다.

사계절을 담기 위해 보낸 1년

‘리틀 포레스트’ 2부작은 기승전결이 없다시피한 작품이다. 하지만 굉장한 몰입감을 자랑한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생생한 자연 풍광 때문이다. 모리 감독은 이 영화를 어떻게 찍었을까.

우선 코모리는 가상의 마을이다. 실제 촬영 지역은 도쿄에서 차로 5시간 떨어진 이와테현의 오오모리라는 시골 마을이다. 만화 원작자인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실제 살았던 동네로, 원작의 배경이 된 지역이다. 사계절을 기록해야 하므로 촬영은 꼬박 1년이 걸렸다. 모리 감독은 도쿄와 이와테현을 왔다갔다하며 영화를 찍었다. 일부 스태프는 1년간 상주하며 현지인과 교류해야 했다. 모리 감독은 “영화에 나오는 농작물을 전부 여자 주인공이 기른 건 아니다. 현지 농부에게 수확물을 얻거나, 경작지를 빌려 찍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농작물이 생각만큼 자라지 않거나, 필요한 열매가 열리지 않을 때는 다른 지역에서 공수하기도 했다. 그는 “자연을 잘 알아야 카메라에 잘 담을 수 있다”고 말했다. 농작물의 이름을 알게 되고,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연을 잘 포착하는 눈도 길러졌다는 것이다.

“자연을 찍는 건 기다림의 연속이죠. 생각해 보세요. 해가 지면서 구름이 붉게 물드는 장면을 찍으려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순발력도 필요해요. 원작 만화에 파란 하늘과 먹구름이 정확하게 반씩 한 컷에 담기는 장면이 있었어요. 저는 그 장면을 결코 못 찍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촬영이 끝나고 철수하던 중 갑자기 파란 하늘에 먹구름이 밀려오더라고요. 순발력을 발휘해 후다닥 찍는 데 성공했어요(웃음).”

어딘가 모르게 고독해 보이는 배우 하시모토 아이(19)를 캐스팅한 것도 뜻밖의 한 수였다. 하시모토가 천연 재료로 뚝딱 요리해 복스럽게 한 입 배어 무는 장면은 그 자체로 빽빽한 긴장감을 자랑한다. 이치코가 흐뭇한 표정으로 “오이시이(おいしい, 맛있다)”라고 말할 때, 그 포만감은 대체 불가다. 모리 감독은 이치코가 혼자 먹어도 외로워 보이지 않도록 신경 써서 연출했다고 말했다. 이치코에게 먹는 것은 치유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쁘장하게 생겨서 처음엔 이 역할에 어울리지 않을까 불안했어요. 그래도 섭외를 결심한 이유는 하시모토의 얼굴에 이치코가 갖고 있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거든요. 게다가 하시모토는 쿠마모토현의 시골 출신이라 농사 짓고 요리하는 데 연기 지도가 필요 없었어요. 저보다 잘하던걸요.”

불행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영화

모리 감독은 2000년 직접 쓴 각본 ‘란도리’로 선댄스 NHK 국제영화제작자상을 수상하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한 불행한 남자의 멜로영화인 ‘연애소설’(2004)과 가족애를 추리극으로 풀어낸 ‘중력 삐에로’(2009)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선보였다. 모리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원칙 중 하나는 새로움이다. ‘리틀 포레스트’ 2부작도 “기승전결이 없는 영화를 연출해 보고 싶다”는 실험정신에서 시작됐다. 장르와 형식은 바뀌어 왔지만 그가 다루는 인물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대체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고독한 인물이다.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에 매료돼요. 그들이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제 작품의 공통점이죠.”

‘리틀 포레스트’ 2부작의 이치코도 마찬가지다. 1편에서 이치코의 자급자족 생활을 집중적으로 보여준 감독은, 2편에서 이치코의 고독한 개인사를 들여다본다. 왜 이치코의 엄마는 딸을 남겨두고 홀로 떠났는지, 왜 이치코는 다시 코모리로 돌아왔는지, 무엇이 그를 열심히 살게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찾는다. 그것은 매년 반복되는 농촌의 지루하고 고단한 삶과 관련 있다. 모리 감독의 결론은 이렇다. “농촌 생활을 겉에서 보면 매년 같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절대 같지 않아요. 농부들은 늘 더 나은 방식을 고민하고,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농사를 짓거든요. 이치코는 사계절을 거치며 그 이치를 깨닫고, 성장하게 되는 거죠.”

모리 감독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도 했다. “카메라 감독님 고향이 대지진이 일어났던 곳이에요. 지진 직후 현지에서 사진을 찍어 왔는데, 모든 게 무너진 마을에 할머니 한 분이 밭을 경작하고 있더라고요. 인간은 정말 강하구나, 저 폐허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구나 하며 용기를 얻었어요. 제 영화도 많은 사람에게 그 사진처럼 용기를 주면 좋겠어요.”

글=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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