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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그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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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으면 언제나 가슴이 찡하다. 연주회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보니 지금까지 수백 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니 달리 명곡이 아니다. 들을 때뿐 아니라 듣고 난 후의 여운도 길다. 한 개의 음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긴밀한 구성과 악장들의 견고한 구조는 놀라울 정도다. 악장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절정으로 몰고가는 힘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순간도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만든다. 가히 클래식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운명’이 사랑받는 또 다른 이유는 작품에 배어든 인간 베토벤의 처절한 외침 때문이다. 유난히 격정적인 이 곡을 처음 듣고 그 의미를 묻는 제자에게 그는 “이렇게 운명은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음악계에서 인정받게 되자마자 찾아온 난청! 얼마나 절망했으면 죽으려고 유서까지 작성했을까. 참으로 무섭고 가혹한 운명이다. “따따따 딴” 하고 울리는 시련은 쉬지 않고 집요하게 우리의 귀를 두드린다. 운명을 상대로 벌이는 격렬한 투쟁과 숨막히는 긴장. 그리고 마침내 승리와 환희의 노래다.

 가정의 달에 베토벤을 떠올린 것은 철저하게 불행했던 그의 가정사 때문이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그를 제2의 모차르트로 만들기 위해 어려서부터 잔인할 정도로 혹독한 음악 훈련을 시켰다. 거의 매일 폭력을 동원하면서 말이다. 어머니는 그나마 선했지만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에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 처지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17세의 베토벤은 두 명의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소년 가장이 되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의 갈등과 애정 결핍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그 후에도 평생 그를 괴롭히는 멍에가 되었다.

 베토벤이 인간관계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동생들에 대해 늘 집착에 가까운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으며, 결국 관계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양육권을 얻기 위해 긴 법정싸움까지 벌였던 조카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베토벤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조카가 자살까지 기도했으니 말이다. 여러 여인을 사랑했지만 모두 실패한 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했고, 하이든을 사사했으나 사람 좋기로 유명한 이 스승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빈에 사는 동안 그는 이웃 및 집주인과의 불화로 인해 무려 70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

 혹자는 말하리라. 그토록 많은 고통이 있었기에 위대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예술은 인생의 깊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라고. 그러나 아무리 예술을 위해서라고 해도 어린 자녀들을 학대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성공한 한 명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한 명조차 왜곡된 애정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생의 희생자라면 말이다.

 오늘도 우리 주위엔 자녀를 성공시키겠다는 부모의 욕심 때문에 혹사당하고 있는 아이들이 넘쳐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오명을 얻은 지 이미 오래고, 서너 명 중에 한 명은 자살 충동을 느끼기까지 한다니 얼마나 잔인한 현실인가. 부모들도 할 말이 아주 없지는 않다. 최악의 청년 실업과 날로 극심해지는 양극화 사회에서 자녀가 살아남으려면 실력이 중요할 뿐 애정은 사치니까. 그래서 독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아이를 다그치는 것 아닐까.

 가정이 가정인 것은 이곳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이해되고 감싸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조차 공부방이나 학원으로 전락한 이 시대에 아이들은 가정을 포기하고 일탈을 꿈꾼다. 아니 부모가 먼저 가정을 포기했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어린이 날, 어버이 날을 지정해도 황폐한 가정을 되살릴 수는 없다. 부모가 변하는 수밖에. 영어나 수학 대신에 아이들이 이 세상에 자신을 이해하고 믿어줄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먹고 자란다.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