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게 「처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처음 있는 일, 처음 보는 일, 처음 당하는 일등 「처음」은 언제나 새롭고 충격적이며 강한 인상을 받게 되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처음이 두번이 되고 세 번, 네 번을 거듭하면 자극이 약해지고 심상해지고 마침내는 일상화된다.
이번 전두환 대통령의 일본방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처음」이 아닌게 없었다. 우리나라 국가원수의 방일자체가 사상 처음이었고 일황과의 대면은 2천년만의 처음이었다. 동경의 궁성에서 태극기와 일장기가 같이 걸리고 애국가와 기미가요가 함께 연주된 것도 처음이었고, 한국국가원수의 기자회견이 일본전역에 생중계 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수많은 「처음」이 두나라 국민에게 준 충격과 감회도 보통정도가 아니었다. 현장의 재일 동포들은 눈물을 흘렸고 양국의 신문·TV는 이들 처음 있는 일로 그 3일간 온통 흥분이었다.
이런 현상을 지켜보면서 기자는 새삼스럽게 한일간에는 왜 이처럼 「처음」도 많고 그 「처음」이 주는 충격도 큰가를 다시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행기로 2시간 남짓 걸리는 가까운 나라끼리, 그것도 2천년이란 세월동안 수많은 공통의 문화유산을 공유한 나라끼리 왜 이처럼 만남이 늦었고 그 만남에 왜 그토록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가.
물론 그 해답은 뻔할지 모른다. 일황이 언급한 것처럼 『금세기의 한시기에 있어서 양국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양국간에는 65년 국교정상화 때 불행한 과거를 씻고 새 출발할 계기가 있었지만 살려나가지 못한 경험이 있다. 국교정상화 후에도 양국관계는 사소한 문제로도 서로의 국민적 감정이 들끓는 대림관계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잘해 보자」고 다짐했지만 지난 19년간의 경험은 그것이 성공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전대통령의 이번 방일은 「불행했던 과거」는 물론 이런 실패의 역사까지 딛고 일어서보
자는데 더 큰 뜻이 있는 것이다.
실제 이번에 두나라 정부는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결의를 여러 장면에서 보여줬다.
그러나 그걸 보고서는 「아직 불안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일본측은 이번에 전대통령을 맞으면서 영접과 경호에 있어 가장 정중한 격식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모든 의전은 최고수준으로 진행됐고 경호에 있어서도 일본사상 최대규모였다.
관심의 초점이 된 일황의 사과문제에 있어서도 확실히 종전의 예보다는 높은 강도를 보였다. 특히 일황이 6, 7세기에 한국인이 많이 건너와 일인에게 학문·문화·기술 등을 가르쳤다고 한 것은 해석하기에 따라 큰 의미가 있다. 일인에 있어 「천황」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면 그 입에서 한국인에게 배웠다는 말이 공식적으로 나온 것은 일인들의 대한관에 큰 영향을 줄수 있기 때문이다.
경호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지경이었다. 하늘에는 전자감시장치를 갖춘 유인비행선이 떠 있었고 거리마다 빌딩마다 구석구석에 삼엄한 경비망이 펼쳐져 있었다. 영빈관출입자와 차량에 대해서는 전파탐지기와 촉수에 의한 철저한 검사가 실시되었다. 행사장에서 취재기자가 일측 경호원에 의해 밀쳐지고 끌려나온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처럼 모든 행사가 실로 완벽하게 진행됐고 일본정부도 우호에 넘친 자세였던게 사실이다. 일본신문·TV도 연일『한일신시대』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 진행된 실무자들간의 「신시대」를 조형하는 구체적 작업은 꼭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큰 것은 크니까 중요하고 작은 것은 작은대로 중요하다』는 일본특유의 자세는 여전했다는 얘기다.
공동성명 작성에 앞서 양측은 일찌감치 『이번에는 대국적으로 하자』는 원칙적인 합의를 했었다고 하는데 일본측은 구체적인 현안에 들어가서는 별로 달라진 점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현안에 대한 절충은 이제부터다. 벌써부터 성의가 있느니, 없느니 할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양국관계의 발전을 위한 이 소중한 기회를 일본측이 얼마나 진정으로 인식하고 구체화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에서 지난 19년간의 경험도 있기 때문에 불안한 심정이 되는 것이다.
전대통령의 역사적 방일이 보여준 신선하고 뜻깊은 「처음」이 두 번이 되고 세 번, 네 번이 되어 한일간에 일상화해야 비로소 신시대는 열리고 동반자관계는 정착될 수 있다. 앞으로 또다시 그처럼 가기 어렵고 만남이 힘드는 일은 없어야 할텐데 그 열쇠를 일본측이 주로 갖고있다면 편견일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