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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정치에 대남 라인 위축 뻔해 … 남북관계 개선 요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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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호 04면

지난달 24일부터 이틀간 평양에서 열린 조선인민군 훈련일꾼대회에서 김정은(앞줄 왼쪽에서 셋째)이 연설을 하고 있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왼쪽에서 첫째)은 졸았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노동신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전에 외교책사인 강석주를 각별히 챙겼다. 외교부 제1부부장(현 노동당 비서) 시절 강석주가 회의 석상에서 꾸벅거리며 졸자 김정일은 이유를 캐물었다. 한참 머뭇거리던 강석주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어린 손녀딸이 밤새 보채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고 답했다. 싱가포르대사관에 딸과 사위가 근무하러 가는 바람에 떠맡았다는 얘기였다. 탈북 망명을 막기 위해 부부가 함께 해외 배치를 받는 경우 아이를 인질 삼아 평양에 남겨 두도록 하는 지침 때문이었다. 김정일은 그 자리에서 강석주의 손녀를 부모에게 보내 주라고 지시한 뒤 “이제 조는 일은 없겠구먼”이라며 웃어넘겼다고 한다.

북한 인민무력부장 현영철 숙청 후

오진우 인민무력부장도 시도 때도 없이 졸거나 하품을 했지만 김 위원장은 나무라지 않았다. 아버지 김일성의 친구이자 군부 원로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 어느 겨울밤에는 노동당사에서 업무를 보다 잠든 간부에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덮어 줬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북한은 간부들에 대한 김정일의 사랑과 배려를 선전하는 ‘혁명일화’로 이를 종종 내세워 왔다.

하지만 김정은 집권 4년 만에 세상이 확 바뀌었다. 졸음에 대한 최고지도자의 관대함이 사라지고 숙청의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전방 경계초소나 고속도로 갓길에 붙어 있을 법한 ‘졸면 죽는다’는 문구가 북한 노동당과 군부 핵심 간부들의 첫째 수칙이 됐다. 말 그대로 회의 도중 깜빡 졸다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인민무력부장이 ‘졸음’으로 함축되는 불경(不敬)과 불충(不忠)의 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2015년 5월 평양 대동강변엔 봄빛이 가득하지만 권력 핵심부는 빙하기처럼 꽁꽁 얼어붙은 분위기다. 공포정치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국정원 ‘처형 스모킹건’ 포착했나
북한은 16일 밤까지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의 숙청 문제와 관련해 아무런 입장을 내지 않았다. 지난 13일 국가정보원이 국회 정보위에 ‘현영철 처형’을 보고한 데 대해 꿈쩍 않고 있는 것이다. 서울과 국제사회의 여론 흐름을 지켜보며 대책 마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란 게 당국의 분석이다.

일부 북한 전문가는 국정원의 판단에 의혹을 제기한다. 현영철이 숨지지 않았고 국정원의 대북 정보망에 구멍이 뚫려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설마 졸았다고 죽였겠나”라는 의아함 때문만은 아니다. 평양 강건종합군관학교에서 공개처형이 집행됐다고 지목한 지난달 30일 이후에도 현영철은 북한 TV의 김정은 관련 동영상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앞서 다른 피숙청자들이 즉각 관영매체에서 사라진 것과 차이가 난다는 얘기다. 2012년 7월 해임된 이영호 군 총참모장은 숙청 발표 6일 후 이름을 감췄고, 2013년 12월 처형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은 닷새 전부터 삭제됐다.

국정원은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핵심 관계자는 “대북 정보와 관련한 실무총책인 한기범 1차장이 직접 보고를 자청해 새벽부터 정보위로 달려갈 정도라면 스모킹 건(smoking gun·결정적 근거)이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귀띔했다. 구체적으로 공개할 수 없지만 대북 감청과 위성 촬영 등 한·미 연합의 대북 정보 자산을 총가동하고 다각적인 첩보를 수집해 분석한 결과란 설명이다. 핵심 고위층 숙청 때마다 공개처형 장소로 사용해 온 강건종합군관학교의 특이 동향을 실시간으로 체크할 정도의 감시망을 갖추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A4 11쪽 분량의 국정원 정보위 보고자료는 “인민무력부장 현영철을 비밀리에 숙청하였음”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다만 “고사총으로 총살했다는 첩보도 입수되었음”이라며 구체적인 처형방법 등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대북 정보 업무에 관여해 온 한 인사는 “첩보가 다양한 확인 과정을 거쳐 시인(是認)되면 정보가 된다”고 말했다. 정보기관 요원들 사이에 쓰이는 ‘시인’이란 용어는 어떤 첩보가 사실인 게 검증됐다는 뜻이다. 이 인사는 “정보위원회에 보고됐다는 건 검증 과정까지 거쳐 거의 100%의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기만술 의심받는 ‘현영철 TV 등장’
최근 들어서는 숙청된 간부들을 북한 TV 영상에서 삭제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11월 김정은이 평양 순안공항 터미널 부실 공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 양강도 농장원으로 추방한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도 요즘 TV 기록 영상에 종종 모습을 보인다. 얼굴 삭제가 숙청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돼 버려 잡음이 이는 걸 북한 당국이 피하려 한다는 관측이다. 현영철 처형 사흘 전인 지난달 27일 국정원이 북한 간부 15명의 총살을 정보위에 보고했고, 이튿날엔 대북 정보 분석 사이트인 38노스가 처형 장면으로 추정되는 위성 영상을 공개한 것도 북한을 위축시켰을 것으로 분석된다. 현영철 처형을 공개하면 “김정은이 무자비한 처형을 지속한다”는 국정원의 정보와 판단을 북한 당국이 뒷받침해 주는 모양새가 됐을 것이란 점에서다.

현재로선 현영철의 처형은 사실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현영철이 처형되지 않고 숙청 또는 근신 상태라면 한국의 정보기관이나 당국에 타격을 가할 북한의 엄청난 카드가 되겠지만 그런 일이 현실화되긴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 노동신문은 15일자 보도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철갑상어 등을 키우는 810군부대 산하 신창양어장을 방문했다고 전했으나 군 핵심인 현영철 무력부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영철 처형 사태에도 불구하고 북한 권력 내부에 별다른 이상징후는 포착되지 않고 있다. 평양에 주재하는 외신기자나 외교관들의 특이 전언도 없다. 일부 대북 매체는 군부대나 핵심 간부들을 대상으로 현영철 처형을 알리고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교양사업이 벌어지고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북·중 국경을 통해 흘러나오는 소문에 불과하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다.

문제는 숨죽인 채 이번 사태를 지켜볼 핵심 간부층의 동향이다. 김정은의 공개·비공개 통치활동을 수행하거나 대면보고를 해야 하는 입장인 이들은 공포감이 더할 수밖에 없다. 고모부인 장성택(국방위 부위원장)에 이어 잘나가던 군부 실세 현영철이 비참하게 몰락하는 걸 목도했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정보위 보고문건에서 고사총을 이용한 처형을 언급한 뒤 “처형 후 ‘반역자는 이 땅에 묻힐 곳도 없다’며 화염방사기를 동원해 시신의 흔적을 없애는 방식도 사용한다”고 밝혔다. 또 참관인들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며 집행 후에는 처형된 자를 비난하며 각오를 다지는 소감문을 작성토록 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영철의 처형을 수백 명의 고위 군 간부가 지켜본 것으로 국정원은 파악하고 있다.

“개성공단 임금 문제도 시한폭탄”
이런 공포정치는 단기적으로 권력 장악력을 높일 수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지속되면 파워 엘리트들의 불만과 반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차두현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김정은이 중·장기적인 권력 안정성을 확보하려면 적당한 시점에 공포정치를 종식하고 신뢰할 만한 2인자 그룹을 확보해야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불안스럽고 공포에 직면한 건 김정은 자신일지 모른다는 진단이다.

정부 당국은 북한 권력 내부의 동향을 주시하는 한편 남북 관계에 불똥이 튀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운다. 북한이 현영철 처형 직후인 5월 들어 대남 도발 위협과 함께 교류·경협에 차단막을 치려는 움직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북한은 16일 6·15 공동선언 15주년과 광복 70주년 공동행사의 장소 문제를 내세워 불발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6·15 공동선언 실천 북측위원회 대변인은 담화를 통해 “6·15는 서울, 8·15는 평양으로 이미 행사 개최 장소를 합의했다”며 “남조선 당국이 6·15 공동행사는 평양에서, 8·15 공동행사는 서울에서 하든가 아니면 두 행사 모두 서울에서 하자고 강요했다”고 비난했다. 정부 수립의 정통성 문제나 광복 70주년의 상징성을 감안해 8·15 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하려 추진해 온 우리 정부의 입장에 반감을 드러낸 것이다. 다소 껄끄러울 수 있는 6·15 행사를 용인하는 대신 박근혜 대통령이 “남북 공동행사로 치를 것”을 주문한 광복 70주년 행사를 성사시키려던 정부의 대북 접근에 빨간불이 켜졌다.

앞서 북한은 현영철 처형이 불거진 13일 밤 서해 백령도 동북방 북방한계선(NLL) 북쪽 약 2㎞ 부근 해상으로 함포와 해안포 등 130여 발을 발사했다. 또 이튿날에는 연평도 인근 NLL 북쪽 해상으로 함포와 해안포 등 190여 발의 사격을 가했다. 북한군이 전방 해안에서 심야에 포 사격 훈련을 벌인 건 이례적인 일이다. 여기에다 북한은 서해 NLL 인근 수역의 우리 함정에 대해 ‘조준타격’ 위협까지 가해 긴장 수위를 높였다.

개성공단 임금 문제도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지난달 기존 최저임금(월 70.35달러) 을 일방적으로 인상한 데 이어 13일에는 출근 거부까지 시사하며 임금 지급을 주장했다. 임병철 통일부 대변인이 나서 “태업과 잔업 거부를 통해 생산 차질을 초래하고 근로자 철수까지 운운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남북 신경전은 거칠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국제 여성평화운동단체 ‘위민크로스디엠지(WCD)’를 활용해 대남 압박을 가할 기세다. 남북 비무장지대(DMZ)를 도보로 관통하는 행사를 추진 중인 이 단체는 24일을 D데이로 잡았다. 단체 측은 이날이 ‘세계 여성 평화군축의 날’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정부는 5·24 대북조치 5주년에 맞춘 ‘불순한 이벤트’이자 남남 갈등 조장 행위로 보고 있어 신경전으로 치달을 공산이 크다.

현영철 숙청 사태를 계기로 김정은 체제 내부 동향을 주시하면서 남북 관계의 안정적 관리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수석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잇단 숙청사태로 북한의 대남 담당 간부들도 김정은에게 유화적 노선을 제시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제한적 접촉만 응하려는 북한과 사회·문화 교류를 앞세워 폭을 넓히려는 우리 정부의 힘겨루기가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현영철 숙청과 북한의 잇단 군사적 도발로 5·24 조치의 완화나 해제는 말조차 꺼내기 어렵게 됐다.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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