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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안경신 후손 뒤늦게 뿌리 찾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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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한 독자가 11일 중앙일보에 e메일을 보내왔다. “저는 올해 63세 된 황경희입니다. (중략) 15년 전 작고하신 아버님(고 황성옥씨)에게 ‘안경신’이 할머니(고 안필녀씨)의 여동생이라고 들었습니다….”

 안경신 선생은 1920년 임신부의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뒤 한국 최초로 사형선고를 받은 여성이다. 그는 당시 “나는 일제 침략자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키는 방법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그건 무력적인 응징이었다”고 했다. 7년 복역 뒤 가출옥했지만 이후 행방은 묘연하다.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으나 받아가는 이가 없었다(본지 4월 25일자 13면 ‘일제에 폭탄 안경신, 전투기 조종 권기옥…잊혀진 그들’). 국가보훈처는 광복 70주년인 올해 안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그런데 직계는 아니지만 방계 후손이 본지 기사를 보고 연락해온 것이다. 황씨는 이런 이야기도 전했다.

 “독립기념관이 개장하던 해(1987년) 아버님이 이모 ‘안경신’을 면회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운 겨울 옥중에 아기를 안고 있었고 난방이 안 되는 감옥에서 신생아가 옷이 없어 입고 갔던 옷을 벗어 덮어줄 정도로 시설이 엉망이었고 영양 결핍과 추위를 견딜 수 없던 아기의 눈은 실명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안 선생을 연구해온 윤정란 서강대 연구교수와 당시 기사 등에 따르면 안 선생은 태어난 지 12일 된 아기와 함께 체포됐다. 그는 일정 기간 함께 옥중생활을 하다 아기를 다른 가족에게 맡긴 것으로 보인다. 안 선생은 1927년 출옥 뒤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자식은 병신이오니 어느 것이 서럽지 않겠습니까마는 동지 장덕진씨의 비명을 듣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세상이 모두 원수같이 생각됩니다.” 이 신문은 “아들은 여덟 살이나 되었건만 앞을 못 보는 병신”이라고 덧붙였다. 후손 황씨에 따르면 안 선생의 가족들은 아기의 장애가 열악한 옥중 생활과 영양결핍, 추위에서 왔다고 판단했던 셈이다. 안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인한 고초가 자녀에게까지 이어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안 선생의 삶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조카인 황씨의 부친은 1·4 후퇴 때 월남했고, 안 선생을 포함해 북한에 남은 가족들과 소식이 끊겼다. 황씨에 따르면 안 선생에겐 언니 필녀씨, 오빠 창석씨를 포함해 형제가 4명이 있었다. 안 선생은 출옥 뒤 평양에 있던 오빠 안세균씨의 집에서 생활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황씨는 “생각해보면 좀 더 관심을 갖고 아버지 말씀을 기록해 두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저 또한 친계가 아니었고 이런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먼 집안이라 생각했기에 잊고 지냈다. 그러다 중앙일보 기사를 보고 이런 선구적 독립운동가를 친척으로 둔 게 자랑스러웠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뿌리의 중요함을 가르칠 수 있고 힘들 때 어려움을 극복할 정신적 에너지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본지는 이 같은 사연을 국가보훈처에 알렸다. 박민석 주무관은 “안 선생은 북한에 남아 한국에 후손이 없는 걸로 알려져 왔는데 이런 경우라면 기록을 검토해보고 훈장을 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민 사무관도 “직계가 아니면 독립유공자의 유족 예우를 받기는 어렵지만 훈장은 가문의 자긍심을 높이는 차원에서 4촌이나 8촌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모할머니는 촌수가 없다는 말도 있지만 4촌에 해당한다는 해석도 있다. 심사 결과에 따라 안 지사가 받아야 했던 훈장이 53년 만에 후손에게 전달될 여지가 있는 셈이다.

 이외에도 후손을 찾지 못해 독립유공자에게 수여하지 못한 훈장은 4819건(5월 14일 현재)에 달한다. 그 명단은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훈처 관계자는 “관심을 갖고 조상들에 대해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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