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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소통은 고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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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영목
번역가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둘째가 군대에 갔다. 대학생 아들이 둘인 집은 대개 둘이 교대로 군대에 가 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마련인데 이 집은 한 학기가 겹치게 되었다. 원래는 한 학기 일찍 갈 생각이었으나 아들이 그 직전에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아버지는 그것이 충분한 입영 연기 사유가 된다고 보아 한 학기 유예를 제안했다. 그래도 당사자는 한 학기가 하루 같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 떨어져 있는 고통이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것이다. 그 고통이 전해지니 아버지는 당사자도 아니면서 젊은 남녀의 관계의 향방에 은근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면서도 흔히 하는 말로 “고무신 거꾸로 신는 것”만 걱정하지 군대 간 아들은 상수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요새는 ‘군화를 거꾸로 신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왜 군화를 거꾸로 신는 사례가 늘어날까? 아버지는 입영을 앞둔 아들 앞에서 차마 그 주제를 화제로 올릴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이유 정도는 짐작이 간다. 그것은 나날이 발전하는 소통의 도구 덕분에 잠자는 시간 빼고는 둘이 쉴 틈도 없이 늘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가 군대에 가게 되면 처음에는 그 연결이 강제로 단절되기 때문에 큰 고통을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최초로 자신의 관계를 길게 생각하고 평가해 볼 여유를 갖게 되고 그러다 마음이 바뀌는 경우도 생긴다. 뒤집어 말하면 군대 가기 전의 관계는 늘 연결되고 소통되는 듯하지만, 실은 그런 착각을 줄 뿐 단단한 남녀 관계의 기초가 되는 진정한 소통은 오히려 막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꼭 남녀 관계가 아니라도 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중요한 이유는 소통을 주어진 것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현대사회는 소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고 단절되는 것이 차라리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만히 있는데 소통이 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단지 과거에는 단절과 소외의 상황이 꽤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던 반면 지금은 소통 수단의 발달로 그런 상황이 위장되어 있고, 또 소통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환상 때문에 진정한 소통이 오히려 차단되는 일도 많아졌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런 헛갈리는 상황이기에 아예 뻔뻔스럽게 불통 마케팅을 밀고 나가는 정치가 무슨 대단한 원칙이라도 고수하는 것인 양 비춰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정치가 거리에 불통의 장벽을 세우는 데 아들과 다름없는 젊은이들이 동원되는 것을 볼 때면 아버지는 심란해진다.

 번역을 해서 지금까지 아들을 길러온 아버지가 볼 때는 인간 소통의 제일수단인 언어 자체가 완전하지 않다. 이런 불완전함 때문에 무궁무진한 가능성도 열리지만, 깊은 소통으로 나아가려면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하는 동시에 언어화되지 않은 것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물론 아들은 그간 커 오는 과정에서 언어의 불완전한 면을 절실하게 느낀 일이 많지 않았겠지만, 예를 들어 아버지와 마주했을 때는 소통이 만만한 게 아님을 좀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나아가서 아들이 여자 친구를 만나는 과정이 언어의 한계를 느끼는 중요한 교육 과정이라고, 아니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소통해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고, 아버지는 점점 꼰대 같은 생각으로 빠져든다.

 깊은 소통을 하는 것은 의지를 갖고 노력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래서 타인은커녕 자신과 제대로 소통하며 사는 사람조차 많지 않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에게 정직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다가 자신과 소통할 문법을 찾아내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군대 갈 만큼 성장한 아들이 이 면에서는 얼마나 성장했을지 궁금해하다가 이내 남 말 할 처지가 아님을 깨닫고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남과 진정한 소통을 이루어 본 경험이 자신과의 소통에 큰 자극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에 다시 아들을 떠올리며 소통이라는 고통을 겪어본 경험이 자산이 되어 어느 쪽이든 신발을 거꾸로 신어야 하는 더 큰 고통은 겪지 않기를 슬며시 빌어본다.

정영목 번역가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