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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266> 유력 정치인과 재·보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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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현일훈 기자

지난 4·29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천정배 의원의 화려한 재기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의 국회 복귀는 야권 재편 논의를 촉발시키고 있습니다. 정치사를 보면 재보선은 전통적으로 정치 거물들의 재기를 위한 급행 티켓이었습니다. 재보선과 거물 정치인, 그 끈끈한 역사를 짚어 봤습니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노무현은 1998년 종로 재·보선서 당선

 재·보선을 통해 정계에 첫 발을 내디딘 거물 정치인은 전·현직 대통령부터 여야 당대표, 원내대표에 이르기까지 수두룩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1997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와 연을 맺어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이 총재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이 총재는 보수 세력의 세를 모으기 위해 칩거 중이었던 박 대통령과 접촉해 지지 선언을 이끌어냈다. 이 연을 계기로 다음 해인 98년 이 총재의 권유로 박 대통령은 4월 2일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등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무난히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연달아 5선을 하며 당 부총재와 당 대표, 비상대책위원장 등을 거쳐 18대 대통령이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재·보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케이스다. 전남 목포 등에서 몇 번의 고배를 맛 본 김 전 대통령은 61년 5월 14일 민주당 후보로 강원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해 민의원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이틀 후인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고 국회는 해산됐다. 당선 이틀 만에 금배지가 날아가 버렸지만 어쨌든 그의 첫 국회의원 입문은 61년 5월 14일,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였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낙선과 정계은퇴 선언·번복 등을 거쳐 97년 12월 18일,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다.

 이 밖에도 재·보선을 통해 처음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단 인물로는 김영삼 정부 시절 당시 민자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한 손학규 전 새정치연합 상임고문이 있다.

 유시민 전 의원도 2003년 4월 24일 노무현 정부 들어 실시된 첫 재·보선에서 당선해 국회의원으로서 첫 발을 뗐다. 유 전 의원은 당선 이튿날 흰색 면바지와 초록색 티셔츠, 감색 상의 차림으로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원 선서를 해 ‘복장 논란’을 부르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계 입문은 아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도 98년 7·21 재·보선에서 당시 집권당인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사퇴한 서울 종로에서였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다.

서청원·이재오·나경원도 인연

1998년 4월 대구달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후보. [중앙포토]

 현재 여야의 잠룡으로 불리는 인사들도 재·보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경우가 많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새정치연합 안철수 전 공동대표 등은 2013년 4·24 재·보선으로 국회에 입성한 재·보선 동기다.

 김 대표는 선거사무장의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형을 받은 이재균 전 의원의 지역구인 부산 영도에 출마해 당선됐다. 김 대표는 19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지만 이를 수용하고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캠프 총괄본부장으로 활약하면서 대선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뒤, 4·24 재·보선을 통해 국회에 복귀했다.

 안철수 전 공동대표 역시 재·보선을 통해 국회로 들어왔다. 안 전 공동대표는 2012년 대선에서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와 후보 단일화를 둘러싼 진통을 벌인 끝에 예비후보직에서 사퇴했다. 잠시 휴지기를 가진 그는 이듬해 열린 4·24 재·보선에서 진보정의당 노회찬 전 의원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서울 노원병에서 당선해 사실상 국회에 처음 입성했다.

 한때 대선주자 후보군에 속했던 이완구 전 총리도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35대 충남도지사에 당선됐지만, 2009년 12월4일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에 반발하며 도지사직을 전격 사퇴했다. 이후 정계 복귀를 저울질하던 이 전 총리는 2013년 재·보선을 통해 국회로 돌아왔다.

 친박 좌장격인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도 2013년 10·30 재·보선에서 새누리당 고희선 전 의원의 사망으로 보궐선거가 치러진 경기 화성갑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재·보선을 통해 복귀한 김 대표와 서 최고위원, 두 중진 정치인은 그 뒤 새누리당의 당 대표직을 놓고 2014년 경쟁하기도 했다.

 새누리당 내 잠룡 후보군 중 한 사람인 김태호 최고위원도 이명박 정부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에서 낙마한 후 절치부심하다 2011년 4·27 재·보선에서 민주당 최철국 전 의원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경남 김해을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2010년 7월 28일 서울 은평을 재선거에선 ‘왕의 남자’ 이재오 의원이 한나라당 후보로 나와 기사회생했다.

 야권의 유력한 대선주자 중 한 명인 박원순 서울시장도 보궐선거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케이스다. 박 시장은 2011년 당시 한나라당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 패배에 책임을 지고 서울시장직을 내던지자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당시 인지도가 미약했던 박 시장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50%를 웃돌던 안철수 전 공동대표와 17분간의 대화 끝에 단일화를 이뤄내면서 지지율이 급등했다.

 이 밖에도 15석이 걸려 ‘미니총선’으로 불렸던 지난해 7·30 재·보선도 잠룡들의 귀환이라는 정치권의 오랜 공식이 통했다. 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 당 최고위원인 같은 당 이정현 의원이 재·보선으로 여의도에 재입성했다. 여당의 불모지인 전남 순천·곡성에서 정치 인생의 승부수를 던졌던 이 의원은 새누리당 의원으론 처음으로 호남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강재섭·임태희·정동영 낙선의 고배

2013년 4월 재·보선에서 당선된 왼쪽부터 이완구·김무성·안철수 당시 의원이 국회에서 의원선서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재·보선은 동시에 ‘잠룡들의 무덤’, ‘신인들의 요람’이기도 하다. 지난해 7·30 재·보선과 이번 4·29 재·보선에서도 여야의 거물 정치인들이 대거 쓴 잔을 들었다. 반면 지역 밀착형 정치 신인들은 대부분 당선됐다. 희비가 선명하게 엇갈렸다.

 손학규 전 상임고문은 재·보선과 인연이 깊다. 손 전 고문은 93년 4·23 재·보선에서 통일국민당 윤항렬 후보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경기 광명 보궐선거에 민자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손 전 고문은 2011년 4·27 재·보선에선 당시 한나라당 임태희 의원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되면서 사퇴한 경기 성남 분당을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강재섭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하지만 지난해 7·30 재·보선에서 수원병(팔달)에 출사표를 던진 손 전 고문은 신인 새누리당 김용남 의원에게 패했다. 두 번의 재보선에선 웃었지만 세 번째엔 고배를 마신 셈이다. 손 전 고문은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7·30 재·보선에선 김두관 전 경남지사도 쓴맛을 봤다. 김 전 지사는 김포 지역에서 자수성가한 기업인 홍철호 의원에게 석패했다.

 새누리당에선 3선 의원, 고용노동부 장관, 대통령 실장까지 지낸 임태희 전 의원이 뜻을 펴는 데 실패했다. 당초 경기 평택 문을 두드렸다가 당 지도부의 요구로 야당 강세 지역인 경기 수원정에 도전한 임 전 의원은 새정치연합 대변인이자 MBC 앵커 출신인 박광온 의원에게 패했다.

 야권 분열이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4·29 재·보선에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한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도 결국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는 이번 선거 입후보를 포함해 네 차례나 탈당을 반복하며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었다. 정 전 장관은 ‘제1야당 심판’, ‘야당 교체’ 등의 구호를 내걸었지만, 투표에서 새정치연합 정태호 후보에게도 밀리면서 빛이 바랬다. 정 전 장관은 27년간 야당의 텃밭이었던 관악을을 여권에 넘겨줬다는 야권분열 책임론에 시달리고 있다.

재·보선 패할 땐 당지도부 책임론 후폭풍

2011년 서울시장에 당선된 박원순 시장. [중앙포토]

 재·보선은 늘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당장 지난 4·29 재·보선만 해도 전패한 새정치연합이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일부 최고위원들은 문재인 대표가 고강도 쇄신 의지를 밝혔음에도 문 대표에게 선거 책임을 질 것을 강하게 요구하는 등 계파 갈등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앞서 2014년 7·30 재·보선의 경우 참패한 당시 새정치연합의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가 선거 이틀 만에 사퇴했다. 이후 야당은 한동안 혼돈에 빠져들었다. 김·안 공동대표 체제가 새정치연합 창당 4개월 만에 붕괴하면서 비대위 체제가 가동됐지만, 인적 쇄신을 둘러싸고 친노·비노 간 계파 갈등까지 표면화하면서 상당기간 동안 여진에 시달려야 했다.

 2011년 4·27 재·보선의 경우 참패한 여권에 인적쇄신 폭풍이 불어닥쳤다. 이명박 정부 말기에 치러진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하면서 국정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컸던 탓에 인적 쇄신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당시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 등 당 지도부가 선거 패배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 했다. 또 당시 임태희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진도 모두 자리를 내놨다. 선거 열흘 후에는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한 5개 부처에 대한 개각이 이뤄지면서 당·정·청에 모두 물갈이 바람이 불었다.

 반면 2005년 4·30 재·보선에서는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전패를 당했지만 당 지도부 사퇴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국회의원 6석을 포함해 기초단체장 등 23명의 선출직을 모두 야당에 빼앗기며 국회 내 여당 단독과반 의석마저 무너졌다. 하지만 당권을 잡은 지 채 한 달도 안됐던 문희상 당시 당 의장은 책임론에서 빗겨갈 수 있었다. 다만 실용파·개혁파 간의 노선 갈등이 폭발하고, 민주당과의 합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터져나오며 후유증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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