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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윤기자의고갯마루얘기마루] 인제 샛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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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샛령 정상에 서니 저 멀리 동해가 보인다.

옛길일수록 그 위에 쌓인 세월의 먼지가 두껍다. 옛길의 매력이란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고 오련한 과거를 더듬는 데 있다.

이번에 찾아나선 백두대간 옛 고개는 샛령(641m)이다. 백두대간을 사이에 둔 강원도 인제군과 고성군을 잇는 고개다. 지도에는 흔히 '대간령(大間嶺)'또는 '새이령'으로 표시돼 있다.

"여기서는 대간령이라 안 하고, 샛령이라 불러. 옛날엔 고성에서 소금 한 말 지고 샛령 넘어 인제 와서는 옥수수나 콩 몇 말과 바꿔서 갔지. 겨우 네 시간 거리였으니까."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사는 차무삼(68)씨. 부친이 고개 너머 고성 출신이다 보니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샛령을 자주 넘었다 했다. 서해안과 달리 염전을 가꿀 수 없는 동해안에서는 가마솥에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었다. 그러니 소금 한 말이 곡식 몇 말 값을 했던 게다.

승정원일기.신증동국여지승람.연려실기술 등에서는 소파령 또는 석파령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물결 '파(波)' 자와 언덕 '파(坡)' 자, 그리고 '소(所)' 자와 '석(石)' 자가 섞여 쓰인다. 연려실기술에서 이 땅의 지리를 개괄적으로 설명한 부분에도 '석파령(石波嶺)'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그러니 옛적에는 제법 이름난 고개였다.

샛령.새이령.대간령 등의 이름에 들어 있는 '사이' 또는 '새'[間]는 '북쪽 진부령과 남쪽 미시령 사이'라는 의미로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 진부령과 미시령이 포장되기 전까지 샛령은 이들 못지 않은 고개였다.

용대리에서 출발한 걸음은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 '마장터'라 불리는 개활지에 닿는다. 혹자는 군마(軍馬)를 길렀던 곳이라 하고, 또 혹자는 말과 마차가 드나들 정도로 큰 장이 섰던 곳이라 한다. 유래야 어떻든 마장터 여기저기서 집터와 돌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은 70년대 조림 사업 때 심은 듯한 잎갈나무가 빼곡하고, 너와집이 두어 채가 남아 있다. 산행 시작 두 시간 만에 샛령 마루에 닿았다.

용대리에서 샛령 마루에 이르는 길은 한 사람이 걷기에 오롯하며 그 자취가 분명하다. 요즘도 용대리 쪽에서 샛령 마루에 오르는 사람들이 수시로 있는 탓이다. 그들은 백두대간의 능선을 몇 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종주하는 사람들이다. 남에서 북을 향해 걸었다면 샛령~진부령 구간이 백두대간 종주의 마지막 구간이다. 부지런한 종주꾼들은 샛령 마루에 백두대간 능선을 잇는 새 길을 냈다. 그들은 샛령 마루에서 벅찬 가슴을 쓸었을 것이며, 진부령에 당도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을 게다.

샛령 마루에서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로 넘어가는 옛길을 탔다. 길은 그 흔적이 희미하며, 이따금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낙엽 더미에 옛길이 파묻힌 탓인데, 간간이 가슴 높이까지 차는 낙엽 더미 속에 몸이 빠졌다.

'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는 "옛길이 지닌 인내와 겸손의 시간을 기억하라"고 쓴 적이 있다. '길은 오랜 세월 동안 인내하면서 제 모습을 지니게 되고, 걷는 이의 발 아래에 놓이면서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 겸손으로 쓸모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안치운,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열림원)

샛령은 옛길이 감내해온 시간을 실감케 한다. 간만에 마음에 쏙 드는 옛 고개를 만났다.

<샛령> 글.사진=성시윤 기자

*** 여행정보

▶ 추천 산행 코스: 용대리→샛령→용대리의 원점 회귀 코스가 적당하다. 경사가 완만하며 길도 평탄하다. 산행 기점은 용대3리 박달나무쉼터(033-462-4182). 동충하초·영지·산더덕 등을 파는 곳이다. 샛령∼도원리 구간(도보 2시간 소요)은 초보자에게는 매우 위험하다.

▶ 대중 교통: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대진행 버스(첫차는 오전 6시15분)를 타고 백담 입구 정류장(033-462-5817)에서 하차한다. 3시간30분 소요. 백담사 입구에서 진부령행 시내버스(오전 10시5분 등 하루 10회) 타고 매바위(진부령·미시령 갈림길)에서 내려 미시령 쪽으로 1.5㎞를 걸어가면 박달나무쉼터가 눈에 띈다.

▶ 답사 상품 : 국토문화여행단(www. ktmtour.co.kr ·02-720-1904). 1박2일간 용대리∼샛령 구간을 트레킹하고, 황태구이·도루묵찌개 등 겨울철 별미를 맛보며 오색온천에서 온천욕도 한다. 내년 1월 7, 21일 아침 서울에서 전세버스로 출발한다. 참가비는 1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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