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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南通新이 담은 사람들] 이난영이 일본어로 부른 '목포의 눈물' 재킷 첫 공개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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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성씨가 1936년 일본에서 발매된 이난영의 앨범 '눈물저즌 두만강'을 들고 있다. 앨범 재킷 전체 공개는 강남통신이 최초다. 이 앨범은 일본의 유명 음악가 후지야마 이치로 등과 함께 제작했다.
이난영의 `눈물저즌 두만강`(1936년) 앨범

“김옥심 선생님의 정선아리랑이 흘러나오는데 번개에 맞은 것 같았죠. 그 자리에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음반을 샀어요. 민요라는 것도 그때 처음 접해본 것이고 김옥심이라는 분도 그때 처음 알게 됐죠.”

 국악평론가인 김문성(44)씨가 우리 소리에 반한 건 1996년 황학동의 한 음반가게에서였다. 김옥심은 60~70년대 ‘방울목’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던 전설적인 경기민요 소리꾼이다. 그러나 75년 인간문화재 선정에서 탈락한 뒤 국악계에서 소외돼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김옥심의 `창부타령`(1957년) 앨범

김씨는 서울 대치동 한국문화의집(KOUS)에서 ‘반락(盤樂), 그 남자의 음반 이야기’를 주제로 매년 열렸던 희귀 고음반 콘서트에 참여해 김옥심을 소개해왔다. 올해 ‘반락’ 행사(4월 14일~5월 26일)에서도 김씨는 ‘불멸의 디바’라는 이름으로 김옥심을 소개했다.

 김씨는 “우리 민요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까지 굉장히 다양하고 풍성하게 전수되고 있었다”며 “아이러니하게도 61년 문화재보호법이 등장하면서 김옥심 선생처럼 문화재로 제정되지 않은 문화사적으로 뛰어난 우리 유산들이 상당 부분 유실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96년부터 김옥심의 고음반과 자료들을 찾아 백방으로 뛰었다. 자료들은 대부분 SP(Standard Play·유성기 음반) 음반이다. “유성기 음반이 꽃피운 건 일제 강점기였습니다. 당시 국악을 전승하고 담당했던 주요 계층은 기생이었죠. 하지만 기생이라는 이유로 굉장히 저평가됐습니다. 그들이 남긴 음악을 찾아 복원하고 재평가하는 게 후손인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씨는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까지 기생으로 살았던 70여 명을 만나 당시의 민요를 녹음하는 작업을 해왔다. 언젠가는 책으로 이 내용을 알릴 예정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기생으로 굴곡진 삶을 살았던 이들의 간곡한 바램 때문이다. “자신이 기생이었다는 게 알려지면 자손들에게 누가 될까 걱정하는 할머니들은 자신이 죽은 후에 자료를 내어 달라고 부탁한다”며 “그분들이 전해준 잊힌 민요 속에는 당시 시대상이나 여인들의 한이 고스란히 담겨진 명곡들이 많다”고만 귀띔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고음반 몇 가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그는 스티로폼을 덧대고 이중 삼중 에어쿠션으로 감싼 박스를 가져왔다. 65년 미국 민속학자인 존 레비가 우리나라에서 당대 최고의 소리꾼들을 만나 직접 녹음한 음반인 ‘코리아 소셜 앤 포크 뮤직’(Korea Social and Folk Music)을 비롯해 가요 ‘눈물젖은 두만강’의 초기 SP음반인 ‘눈물저즌 두만강’,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 이난영이 36년 일본 활동 당시 제작한 음반, 김옥심의 57년 앨범인 ‘창부타령’을 공개했다. 그는 “이난영의 앨범 재킷 전체 공개는 강남통신이 최초”라며 웃었다.

만난 사람=김소엽 기자 kim.soyub@joongang.co.kr

방울목 김옥심의 '정선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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