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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오바마, 링컨 그리고 아베(安倍)의 마지막 기회

중앙일보

입력

언젠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린치핀’(linchpin 핵심축)' 미일동맹을 ‘코너스톤(cornerstone 주춧돌)’에 비유한 적이 있다. 2013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 의회 상하 양원합동 연설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일본 총리는 한 번도 이러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역시 린치핀이 코너스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아베 총리의 방미는 달랐다. 박근혜 대통령처럼 상하 양원의 합동 연설을 영어로 하였고 오바마 대통령 내외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일본의 역대 총리 중에 취임 3년이 다 되도록 한국과 정상회담을 못하고 있으며 2013년 12월에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미국을 크게 실망시켰던 성적표에 의하면 뜻밖으로 볼 수 있다.
70년 전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 낸 미국은 일본을 영원히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로 만들 계획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 낙농국가를 만들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군수재벌을 해체하고 일본 내 군수시설은 동남아시아로 보내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아시아 정세는 미국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중국의 내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이 장제스(蔣介石)에 승리하여 공산 중국을 건국하고,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김일성이 기습적인 남침전쟁을 감행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고무되어 일본 내에서 좌익 공산주의자 활동이 강화되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이 한가하게 일본을 낙농국가로 둘 수 없었다. 1951년 미국은 일본과 안전보장 조약을 체결하고 1960년 이를 보완(신미일안보조약), 미일동맹의 실질적 근거를 만들었다. 그리고 1978년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일방위협력지침(안보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1997년에는 이를 개정, 냉전 해체 후 북한의 핵 위협 등 새로운 안보환경에 대응하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상하는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미일동맹을 글로벌로 확대하였다.
“힘이나 강압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변경을 시도해 주권과 영토의 일체성을 해치는 행동은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는 미일정상의 공동성명처럼 중국이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에서 예상되는 군사행동이나, 해저자원이 풍부하고 여러 나라와 영유권 분쟁이 되고 있는 남중국해에 모래장성(great wall of sand)을 쌓아 인공섬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미일 공동 대응이 예상된다.
필자는 일본에 근무하면서 일본은 태풍의 나라라는 생각을 했다. 겨울이 지나면서 남태평양에서 발달된 태풍이 수없이 올라온다. 태풍이 너무 많아 이름대신에 올라오는 순서대로 번호를 매길 정도다. 그러나 한반도까지 도달하는 태풍은 많지 않다. 대부분 일본 열도의 높은 산에 부딪쳐 깨지고 말기 때문이다. 일본 지도를 보면 일본열도가 한반도를 둘러싸고 활처럼 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열도는 한반도로 올라오는 태풍의 방파제(water-typoon breaker)이면서 지정학적으로는 대륙의 세력을 막아주는 태평양의 보루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진과 함께 일본의 최대의 자연재해인 태풍은 카미가제(神風)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외침으로부터 지켜주기도 하였다.
20세기 초 극동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진(南進)은 중국과 인도에 기득권을 가진 영국을 긴장시켰다. 영국은 아프리카 종단정책과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광을 확보하기 위해 현지의 네덜란드계 백인 보어인과 두 차례 보어전쟁( Anglo-Boer War)으로 러시아의 남진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통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얻은 요동반도를 반환케 하여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하고 있었다. 영국은 일본과 함께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영일 동맹을 맺고 러일전쟁에서 전비(戰費)금융지원으로 일본의 승리를 도왔다. 일본은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를 이용 대한제국을 합병(경술국치)한다. 그 후 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망하지만 독일제국의 부상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유지한다.
양호우환(養虎憂患)이라고 할까. 1차 세계대전 후 세력이 커진 일본의 대륙(중국) 침략을 우려한 영미 등 해양세력은 일본을 경계하였고 결국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후 소련의 부상과 냉전 그리고 소련이 붕괴되었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의 중국이 부상했다. 덩샤오핑은 도광양회(韜光養晦 칼날의 빛을 감추고 은밀히 힘을 기른다)의 원칙을 지켜 주변국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덩샤오핑 사후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를 거쳐 시진핑(習近平) 주석에 이르러서는 개혁 개방 30년의 성과를 내세워 중국몽(中國夢) 실현을 위한 유소작위(有所作爲 필요할 경우 제 몫의 역할은 한다)의 정책으로 바뀌었다.
미국이 중국의 부상에 대응 일본과의 동맹 강화가 필요해진 것은 변화된 지정학적인 환경이 만들어 주었다. 일본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정학적 환경만 믿고 잘못된 과거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과거 제국주의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일본은 미일관계만 좋으면 아시아 주변국과의 관계도 좋아질 것이라는 착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 등 아시아 국가와 관계가 좋아야 미국의 진정한 존경을 받고 지속 가능한 신뢰도 끌어 낼 수 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에서 과거사 문제를 조기 극복하여 이 지역에서 존재감을 갖는 것이 미국으로서도 바라는 바일 것이다.
아베 총리의 방미에서 인상적인 것은 링컨 기념관에서 내셔널 몰을 바라보는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 두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링컨 기념관으로 안내한 숨은 메시지가 궁금하다. 링컨 대통령 서거 150주년을 맞이하여, 과거사와 관련 화해와 치유를 촉구하는 링컨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추측도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진짜 의도는 이름이 같은 아베(安倍-Abe) 총리가 노예(slave)해방으로 유명한 링컨(에이브-Abe) 대통령을 본받기를 기대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 내내 성노예(sex slave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방청석에서 쓸쓸히 지켜보고 있었지만 한마디도 언급도 없었다.
아베 총리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다. 지난 4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와 이번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 등 아베 총리에게 주어진 두 번의 기회는 지나갔다. 남은 것은 8월15일의 총리 담화이다. 세간에서는 두 번의 연설에 실망하여 한국 외교의 실패라는 질타성 반응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오는 6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라는 중요한 외교 무대가 남아 있다. 에드 로이스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도 “이제는 8월의 종전 70주년 기념일이 마지막 기회다” 라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1971년의 ‘닉슨 쇼크’ 같은 ‘아베 서프라이즈’를 기대하면서 미워도 다시 한 번 8월의 담화를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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