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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쇠파이프에 캡사이신 물대포 … 다시 깨진 평화집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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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1일 민주노총이 주최한 세계노동절대회 참가자 들이 서울광장 집회 뒤 청와대로 행진을 시도하다 경찰과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는 행진을 막기 위해 세워둔 경찰버스를 쇠파이프 등을 휘둘러 파손했고(왼쪽),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캡사이신을 섞은 스프레이와 물대포를 쏘며 저지했다. [뉴시스]
조혜경
사회부문 기자

근로자의 날이었던 지난 1일 오후 10시쯤. 시위대 1300여 명이 점거한 서울 안국동 로터리 왕복 7차로는 온통 희뿌연 액체로 뒤덮였다. 경찰이 살수차 세 대에 캡사이신을 섞어 쏜 일명 ‘캡사이신 물대포’의 흔적이었다. 살포 각도는 평소보다 10도가량 높아 물줄기는 도로 전체에 뿌려졌다. 정면으로 맞지 않은 시위 참가자들도 매운 공기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옷깃으로 코와 눈을 싸맨 채 생수통을 얼굴에 쏟아붓는 사람들 사이로 “XX, 이건 인권 침해야!”란 고함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경찰 쪽 상황도 참담했다. ‘차벽’으로 쓰인 20여 대의 경찰버스는 시위대가 쇠파이프로 내려친 탓에 대부분의 창문이 깨져 있었다. 타이어는 주저앉은 상태였다. 버스 가운데 부분엔 “차벽을 쓸어버리겠다”며 시위대가 묶은 쇠사슬과 밧줄들이 늘어져 있었다. 바닥엔 부서진 경찰 펜스, 방패, 무전기, 찢긴 보호복 같은 잔해들이 나뒹굴었다.

 이날 오후 3시 서울광장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2만2000명(경찰 추산, 주최 측 추산 5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2015 세계노동절 대회’ 집회가 열렸다. 민주노총과 4·16가족협의회·4·16연대는 이날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철야 행동을 하기로 한 상태였다. 이에 대해 서울지방경찰청은 “질서유지선 이탈, 도로 무단 점거, 경찰 폭행 등 불법 시위 행동이 없을 경우 차벽을 일절 설치하지 않겠다”고 했다. 지난달 26일에 이어 평화 집회가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됐던 이유다.

 충돌은 집회 후 을지로를 향해 행진하던 시위대 6000여 명 중 선두 100여 명이 갑자기 “청와대로 가자”며 방향을 재동·안국동 쪽으로 틀면서 시작됐다. 이에 경찰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버스 10여 대를 동원해 재동과 안국동, 공평동 로터리에 차벽을 설치하고 해산 경고방송을 했다. 오후 9시부터 시위대는 물병과 쇠붙이, 불붙은 이불 등을 경찰 쪽으로 던지고 경찰은 방패로 시위대 선두를 밀쳐내고 캡사이신을 뿌렸다. 대치 끝에 집회 참가자 42명이 연행됐다.

 다시 재연된 도심 속 차벽과 폭력 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김민지(27·여)씨는 “주말 집회 땐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데 3시간씩 걸린다”며 “이젠 거리로 나가기가 무서울 정도”라고 말했다. 을지로와 종로 인근 식당 주인들은 이미 ‘집회 포비아(공포증)’에 걸려 있다. 종로 르메이에르 빌딩에서 음식점을 하는 김성자(56·여)씨는 “집회 때문에 주말 손님이 끊기는 데다 집에 가는 길도 막혀 괴롭다”고 호소했다.

 민주노총과 4·16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6월까지 각각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폐기, 최저임금 1만원 인상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계속 열 계획이다. 앞으로 다가올 주말마다 도심이 ‘폭력의 장’으로 변할지 여부는 이제 유가족과 시민·노동단체, 그리고 경찰의 손에 달려 있다.

조혜경 사회부문 기자 wisel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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