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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라, 감각의 날을 세우고 보아라,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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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호 09면

◀◀ Belgravia by Nigel Hurst(큐레이터) 1. Royal hospital, Royal Hospital Road 2. Royal court Theatere, 50-51 Sloane Square 3. Rose Uniacke, 80 Pimlico Road 4. Nicholas Haslam, 12-14 Holbein Place 5. Jamb, Pimlico Road 6. Linley, 60 Pimlico Road 7. Lamberty, 46 Pimlico Road 8. Daylesford Organic, 44b Pimlico Road 9. Ramsay Prints, 227 Ebury Street 10. Gordon Watson, 28 Pimlico Road 11. Wild At Heart, 30a Pimlico Road 12. Saint Barnabas church, Saint Barnabas Street. 13. Mozart House, Mozart Terrace, Ebury Street. 14. 24 Ebury Street 15. Philip Treacy, 69 Elizabeth Street 16. Poule Au Pot, 231 Ebury Street
▲▲ Secret Soho by Sir Norman Rosenthal(미술사학자) 1. Sir Norman Rosenthal’s flat, Lexington Street 2. Andrew Edmunds print shop, 44 Lexington street 3. Herald Street Gallery, 37 Golden Square 4. Marian Goodman Gallery, 5-8 Lower John Street 5. Sadie Coles Gallery, 62 Kingly Sreet 6. Lights of Soho Gallery, 35 Brewer Street 7. Lina Stores, 18 Brewer Street 8. Gosh! Comics. 1 Berwick Street 9. The Cloth House, 47 Berwick Street 10. Paul A. Young Chocolatiers, 143 Wardour Street 11. Gerry’s Wines & Spirits, 74 Old Compton Street 12. I Camisa, 61 Old Compton Street 13. The Colony Room, 41 Dean Street 14. Algerian Coffee Stores, 52 Old Compton Street 15. The French House, 49 Dean Street 16. Maison Bertaux, 28 Greek Street 17. Bar Italia, 22 Frith Street 18. The House of St. Barnabas, 1 Greek Street 19. Andrew Edmunds, 46 Lexington Street
▲▲ Hoxton & Shoreditch by CEPT/Mike Ballard(낙서화가) 1. Pure Evil Gallery, 108 Leonard Street 2. Village Underground trains, 54 Holywell Lane 3. The Bricklayers Arms, 63 Charlotte Road 4. The Coffee Shop at SCP, 135-139 Curtain Road 5. Hoxton Square 6. Hoxton High Street 7. Hoxton Monster Supplies, 159 Hoxton Street 8. Bacchus pub, 177 Hoxton Street 9. Hoxton Hall, 130 Hoxton Street 10. Geffrye Museum, 136 Kingsland Road 11. Cremer Garage, 35 Cremer Street 12. Hassard Street, off Hackney Road 13. The Premises, 209 Hackney Rd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는 매년 하나의 단어를 화두(話頭)처럼 붙든다. 창업 150주년을 맞은 1987년, 장-루이 뒤마(1938~2010) 회장이 시작한 새로운 전통이다. 에르메스의 넘치는 활력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그는 ‘겨울 불꽃놀이’라는 테마를 생각해냈고, 그 뒤로 매년 다른 테마를 정해 기업의 정신과 방향을 담아내 왔다.

런던에서 열린 ‘에르메스 2015 테마’ 행사

지금은 아들인 피에르-알렉시 뒤마 에르메스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분야는 다양하다. 말·태양·나무·손 같은 명사가 있는가 하면 엑조티시즘·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시간의 선물·메타몰포시스처럼 추상적인 것도 있다. 아시아·아프리카·지중해·인도 같이 지역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그리고 스물 아홉번 째인 올해의 테마는 ‘플라뇌르 포에버(Flâneur forever)’다. 플라뇌르는 프랑스어로 ‘여유롭게 산책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도시의 산책자』에서 언급한 플라뇌르의 개념은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는 관찰하고 머리로는 사고하며 자신만의 속도로 걷는 사람이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말을 빌리자면 “경험하기 위해 도시를 걷는 사람”일 터다.

올해의 테마 행사가 진행된 곳은 런던. 세계 각국 브랜드 담당 기자 250여 명을 11개 그룹으로 나눴다. 11명의 저명한 문화인이 각 그룹의 가이드가 됐다. 이들의 안내를 받으며 기자들은 오전 내내 토박이만 아는 내밀한 곳들을 그룹별로 걸어서 둘러보았다. 오후에는 런던의 대표적인 화랑인 사치 갤러리로 모두 모여 ‘플라뇌르’ 컨셉트가 반영된 에르메스의 새 전시를 참관했다.

피에르-알렉시 뒤마 디렉터는 “본능적인 감각의 날을 세우고 걷는 이는 한가로운 산책길에서도 찰나를 놓치는 법이 없다”며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것을, 이미 보았던 것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가까운 곳에서 먼 곳을 발견하라”고 주문했다.

그 느릿한 깨달음의 현장에 중앙SUNDAY S매거진이 다녀왔다.

※중앙SUNDAY는 에르메스의 이번 런던 플라뇌르 11개 코스를 모두 소개합니다. 코스마다 추천된 장소 십여 곳에 대한 설명은 인터넷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Spitalfields by The Gentle Author(파워블로거) 1. Christ Church Spitalfields, Commercial Street 2. Spitalfields Antiques Market, 16 Horner Square & Commercial Street 3. Townhouse, 5 Fournier Street 4. Silk Weaver’s House, 31 Fournier Street 5. Crescent Trading, Unit 2, Quaker Court, Pindoria Mews, 41 Quaker Street 6. Brick Lane Beigel Bakery, 159 Brick Lane 7. Gardners’ Market Sundriesmen, 149 Commercial Street 8. The Golden Heart pub, 110 Commercial Street 9. The Ten Bells pub, 84 Commercial Street 10. Bishopsgate Institute, 230 Bishopsgate 11. Verde & Co Grocery, 40 Brushfield Street 12. St. John Bread & Wine, 94-96 Commercial Street

그랜트와 로버츠가 썸 타던 영화 ‘노팅힐’ 속 그집
지난달 16일 오전. 식사를 마친 한국팀에게 비로소 행선지가 공개됐다. 블랙캡이 향한 곳은 하이드파크 북서쪽의 노팅힐. 영화 속에서 서점 주인으로 나온 휴 그랜트와 대스타 줄리아 로버츠가 알콩달콩 ‘썸’을 타던 바로 그곳이다. 오전 내내 이 일대를 걸어다닐 예정이다. 평소의 런던답지 않게 하늘이 맑고 파랬다. 바람은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하얀 재킷 정장이 잘 어울리는 건축가 소피 힉스는 노팅힐 주택가에 있는 자신의 4층짜리 스튜디오 맨 위층에서 기자들을 맞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여성의 이력이 간단치 않다. 영국 보그에서 패션 에디터를 지냈는가 하면 클로에(Chloe)의 매장을 디자인했고 폴 스미스 향수병도 만들어냈단다. 곧 서울에 아크네(Acne) 스튜디오 매장도 런칭한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데미언 허스트·트레이시 에민·채프먼 형제 등 이른바 ‘젊은 영국 작가들(young British artist·yBa)’을 세상에 드러낸 센세이션’전(1997년)에도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여러분, 대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아시죠? 저희 옆의 옆집이 바로 그분 스튜디오였어요. LA로 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작업을 했죠. 다큐 드라마 ‘비거 스플래시(A Bigger Splash)’에 1970년대 젊었을 무렵의 작가의 모습과 이곳 스튜디오가 잘 나오죠. 잠깐 보실래요?”

DVD 관람에 이어 본격적인 ‘산책’이 시작됐다. 캐러비언 주민들이 이 일대로 대거 이주하면서 런던에서도 가장 이국적인 문화지대를 형성하게 됐다는 설명에 이어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가 쾌락주의자 록 스타로 나와 충격을 준 영화의 무대가 됐던 집도 소개했다(사실 영국에서 유명인이 살았던 집 벽면에는 동그란 파란색 안내판이 붙어 있다. 눈을 크게 뜨고 다니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분홍·파랑·연두·노랑이 곱게 칠해진 빅토리아 풍 타운하우스들을 지나 1910년 문을 연 영국 최초의 영화 상영관 ‘더 일렉트릭 시네마’로 들어갔다. 그야말로 옛날식 극장식당 같은 분위기다. 푹신한 팔걸이 의자에서 즐기는 입장료는 18파운드(약 3만원), 마지막열 2인용 소파석은 무려 45파운드(약 7만5000원)로 꽤 비쌌다.

▼▼ Chelsea by Zebedee Helm(카투니스트) 1. Bram Stoker’s House, 18 St. Leonard’s Terrace 2. Wellington Square 3. 138a King’s Road, Markham House 4. Michael Hoppen Gallery, 3 Jubilee Place. 5. The Pheasantry, 152 King’s Road 6. 1 Flood Street 7. Chelsea Town Hall Register Office, Chelsea Old Town Hall, King’s Road 8. Chelsea Farmers’ Market, 125 Sydney Street 9. Nell’s 191 King’s Road 10. Oakley Street 11. 55 Glebe Place 12. Green & Stone, 259 King’s Road 13. Mallord Street 14. 430 King’s Road 15. The Moravian Cemetery, 99-100 Cheyne Walk 16. 16 Cheyne Walk 17. Chelsea Physic Garden, 66 Royal Hospital Road

1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스트리트 마켓 포토벨로(Portobello) 로드로 접어들었다.

‘낙서화가 뱅크시의 비공식 상점’을 비롯해 온갖 물건을 파는 상점과 노점상이 즐비하다. 온몸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는 상인들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줄리아 로버츠와 헤어지고 이 거리를 걷는 휴 그랜트 모습 뒤로 4계절이 차례로 펼쳐지던 영화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저기 기둥 두 개짜리 파란 대문집 보이죠? 영화 속 휴 그랜트가 살았던 그 파란 대문집이에요. ‘노팅힐’의 시나리오 작가 리처드 커티스가 잠깐 살았었죠. 저 파란 문은 한참 전에 자선단체 경매용으로 팔려나갔는데, 그 뒤로 그냥 저렇게 남아있어요.”

31층짜리 트렐릭 타워로 가는 길. 검정 말이 이끄는 검정 마차와 그 뒤를 좇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장례 행렬이었다. 방향이 같아 한동안 문상객이 돼야 했는데,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레게풍으로 연주하며 걸어가는 모습이 익숙한 듯 낯설었다. 헝가리에서 망명한 에르노 골드핑거의 설계로 72년 만들어진 이 복층형 아파트에서는 런던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보통 2층, 높아야 4~5층짜리 건물이 대부분인 런던에서 독불장군처럼 서 있었다. 아파트 아래 조성된 ‘그러는 동안에(Meanwhile)’라는 재미난 이름의 공원 옆으로는 특이하게 운하가 있었다. 그리 폭이 넓지도 않았는데 버밍햄까지 이어져 있다고 했다. 운하 옆길은 고즈넉했다. 걷는 길과 수면과의 차이가 별로 크지 않았다. 집중호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둑을 높이는 우리와 많이 달랐다. 날씨는 인간을 지배한다.

다른 팀들이 궁금해졌다. 다들 어디쯤 걷고 있을까. 첼시·벨그레이비어·소호·메이페어·웨스트엔드·블룸즈베리·킹스크로스·스피탈필즈·혹스턴과 쇼디치·메릴리번을 구석구석 누비며 그들은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산책’ 코드에 숨겨놓은 ‘신상’들
사치 갤러리에 도착하니 2층으로 올라가란다. 에르메스의 ‘원더랜드’ 전시(4월 9일~5월 2일)다. 전체가 11개 코너로 구성돼 있다. 11이란 숫자가 우연이 아닌 듯 싶었다. 산책과 어떻게 어울리는 전시라는 것일까.

첫 번째 방 이름부터 ‘산책하다’다. 경쾌한 음악 속에 실버 볼에서 반사되는 수많은 빛 조각이 방 전체를 천천히 돌아가는 가운데, 다섯 개 화면에서는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흑백 영상으로 흘러나왔다.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를 비롯한 여러 영화 속에서 파리 시내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만 편집해 놓은 듯했다.

두 번째 방은 지팡이 코너다. 걷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다. 에밀 에르메스 뮤지엄 소장품 중 다섯 점을 골라 벽면에 전시해 놓았다. 특이한 모양의 지팡이는 사용법을 영상으로 소개했는데,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지팡이는 어깨에 걸칠 때 편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식이다. 손잡이에 양초가 달려있는 지팡이, 말머리를 누르면 말이 혀를 낼름 내미는 유머러스한 지팡이도 흥미로웠다. 현장 안내원은 천장에 매달아 놓은 여성용 우산을 가리키며 “꿩 털로 만든 것”이라고 귀띔했다.

세 번째 방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장롱문을 열고 장롱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었다. 선반에는 에르메스의 시그니처 색인 주황색의 상자들로 가득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좌우로 유리 진열장이 있다. 야외에서 쓰는 상품을 모아놓았다. 왼쪽은 여성용, 오른쪽은 남성용이다. 남성용 코너엔 승마용 헬멧, 스킨스쿠버용 오리발, 가죽장갑 등이, 여성용 코너에는 각종 백과 스카프가 디스플레이 돼 있는데, 그냥 착용하고 바로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 놨다. 진열장 조명을 번갈아가며 밝히니 오히려 뭐가 있는지 더 궁금해져서 집중력이 높아졌다. 건널목 표시가 있는 네 번째 교차로 방 벽면에는 올해 남녀용 ‘신상’ 신발이 가지런히 붙어 있었다.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디스플레이 방식이 신선했다. 사람 모습 그림자를 발로 밟으면 그림자의 생각을 소리로 들을 수 있는 인터랙티브 영상물도 재미를 줬다.

시설물이 모두 거꾸로 설치된 다섯 번째 광장 방에 들어갔다. 유리 우체통 속에서 형형색색 핸드백들이 자태를 뽐냈다. 거꾸로 붙어있는 가로등의 유리 전등 부분에는 에르메스 시계를 집어넣어 놓았다. 흥건해진 빗물에 푸른 하늘이 비친 모습을 LED 화면으로 만들어 놓은 여섯 번째 ‘비 온 후에’ 방, 병 속에 작은 주얼리 아이템들을 집어넣어 유심히 봐야 찾아낼 수 있게 만든 일곱 번째 ‘잊혀진 물건의 카페’, 스프레이로 팝아트적 영상을 벽면 가득 그려놓은 여덟 번째 ‘거리의 아티스트’ 방을 지나가면 ‘통로’ 코너다. 푸른색 포슬린 접시들이 깨지지 않게 조심스레 앉아있는 커다란 코끼리 인형, 큼직한 새장 속에서 스카프를 두르고 천연덕스럽게 앉아있는 강아지가 미소를 머금게 한다.

열 번 째 방은 ‘마법’이 일어나는 곳이다. 주전자와 찻잔이 슬그머니 공중부양을 하고 마네킹이 저절로 움직인다. 벽면 초상화 속 개의 표정이 근엄하다. 기묘한 환상의 공간이다. 이제 마지막 열 한번째 방의 이름은 ‘홈’. 집에 왔다.

산책을 마칠 시간이다. 불이 켜지면 벽면에는 가는 선 그림 밖에 없어 보이지만 어느 순간 어두워지고 빛이 뿌려지면 근사한 석조문이 된다. 미디어 파사드다. 현실과 환상은 그렇게 다시 연결된다.

전시를 다 보고 나니 비로소 에르메스의 전략이 이해가 됐다. 올해의 테마를 선정하고 그에 따른 신상품 소개와 전시장 디스플레이가 자연스럽게 하나를 이뤘다.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 기실 할 얘기는 다 하고 있었다. 세련된 것은 직설적이지 않았다.

런던 글·사진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에르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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