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일으킬 밑천이 필요했다 … 도쿄로 날아간 JP “한국 분단은 일본 책임 … 고통 비용 내라” 이케다와 담판

중앙일보

입력 2015.04.29 01:19

업데이트 2015.04.29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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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61년 11월 11일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왼쪽 둘째)이 일본 총리 관저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왼쪽) 등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오른쪽은 제6차 한·일 회담에 참석 중이던 정일영 대표. 박 의장은 이튿날 이케다 총리와 그의 집무실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 국교정상화 현안을 조속히 타결하는 데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1961년 가을, 고민이 깊어갔다. 혁명정부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나라의 빈곤을 몰아내고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해법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다. 때마침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11월 14일 정상회담을 갖자고 공식 초청했다. 나는 박 의장의 방미를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 협상 타개와 연계하려 했다. 오랜 시간 속에 숙성된 생각이었다. ‘나라를 일으키려면 밑천이 있어야 한다. 밑천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대일(對日) 청구권뿐이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극비리에 중앙정보부 일본 라인을 통해 나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의 면담을 추진시켰다. 박정희 의장에게는 일이 거의 성사된 단계에서 보고드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일절 모르게 했다. 내가 이렇게 비밀을 유지한 까닭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외국 총리를 만나는 외교 행위에 비밀을 다루는 국가정보기관의 장이 나설 성격이 못 되는 것이었다. 한·일 회담 재개 같은 민감한 문제가 사전에 새나가면 꼭 가타부타하는 사람들이 생겨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것도 보안을 지켰던 이유였다. 박 최고의장 옆에는 벌써부터 재간을 부리며 일일이 반대할 이유를 찾아내 문제를 일으키는 측근들이 생겼다.

 61년 10월 24일 도쿄 왕궁 앞에 새로 지은 뉴 팔레스라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옥상에 올라가 봤는데 그 앞 도로가 줄지어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장관(壯觀)이었다. 오다이바(お台場)란 동네를 보니 집집마다 지붕 위에 안테나가 직립(直立)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부러웠다. ‘어떤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이런 나라를 만들겠다. 기필코 경제성장을 이루겠다’는 결기가 일었다.

 이튿날 오전 11시 일본 국회의사당에 있는 총리실에서 이케다 총리를 만났다. 나는 “11월 중순에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에 가시게 됐습니다. 박 의장이 방미하는 길에 도쿄에 들러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우리 혁명과업 중 하나입니다. 회담을 위한 회담이 아니라 해결을 위한 회담을 해야겠습니다”라고 용건을 얘기했다. 이케다 총리는 “한·일 회담은 양국의 앞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박 의장께서 도쿄에 오시면 국빈으로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두 분의 만남을 위해 제가 먼저 와서 길을 깔아드리는 셈입니다. 그러니 이젠 총리의 친서를 휴대한 특사를 한국에 보내 박 의장의 일본 방문을 정식으로 초청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국민정서상 박정희 의장의 방일(訪日)을 일본 측이 초청하는 형식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이케다는 소득배증 운동으로 일본 고도성장의 기초를 닦은 정치인이었다. 역사의 진행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말씀을 들어보니 김 부장 같은 분의 보좌를 받고 계신 박정희 의장께서도 좋은 정치를 하실 분으로 보입니다. 특사를 보내겠습니다”고 답변했다.

 이케다 총리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간사이(關西)지방 101개 회사의 회장을 지내던 거물 경제인 스기 미치스케(杉道助)를 특사로 보내 박 의장을 초청했다. 이렇게 해서 11월12일 도쿄에서 박정희-이케다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박 의장은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대일 청구권에 성의를 보인다면 우리는 평화선 문제에 신축성을 보이겠다”고 밝혔는데, 한·일 회담이 타결해야 할 핵심 쟁점을 조리 있게 정리한 말씀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인 나는 어떻게 해서 한·일 외교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는가.

김종필(JP) 중정부장이 1962년 12월 한국을 방문한 오노 반보쿠 일본 자민당 부총재(오른쪽)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오노 부총재는 일본 정계를 움직이는 자민당 8대 파벌의 조정자로 한·일 협상을 타결하는 데 정치적 뒷받침을 했다. [중앙포토]

 51년 9월 8일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외교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 48개국과 일본이 맺은 평화협정이다. 식민지였던 한국은 일본과 정식으로 전쟁 상태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화조약에 초대받지 못했다. 대일강화조약은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는 양국 간 별도 대화를 통해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51년부터 61년 5월까지 1~5차 회담이 진행됐다. 5·16 후에는 61년 10월 20일 6차 회담이 시작돼 64년 4월까지 이어졌다.

 국교정상화 협상의 주테마는 결국 일본한테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일본이 식민지 시대 때 한국인에게 진 빚이나 가한 고통에 대한 대가를 한국이 받아오는 문제다. 일본은 더 이상 진전시키면 자기네가 불리하다는 생각이었고 한국 측은 말 한마디 잘못하거나 제대로 받아오지 못하면 매국노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일본 문제만 나오면 전부 뒷짐만 지고 주저앉아 있는 형편이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와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경멸감이 많이 남아 있을 때였다.

그런 정황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그래, 내가 하자. 혁명에 목숨까지 바친 놈인데 무슨 비난을 받든 뭐가 두려운가. 욕을 할 테면 해라.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움직인다. 내가 길을 뚫겠다. 용기도, 배짱도, 발상도 새로 내겠다.’

이런 결심을 박정희 의장에게 다 말씀드리고 한·일 정상회담의 다리를 놓기 위해 도쿄로 날아간 것이다. 이케다 총리와는 1년 뒤인 62년 10월에 또 만났다. 한·일 협상은 대일 청구권 문제로 실무 협상이 꽉 막혀 있었다.

결국 정치협상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21일 오다와라(小田原·가나가와현 남서부에 있는 도시)에서 열린 일본 MRA(도덕재무장운동) 초청 행사에 참석했다. 오다와라의 전주(電柱)와 담벼락 등에는 북한을 추종하는 조총련(朝總聯)이 쓴 ‘매국노, 제2의 이완용 김종필은 돌아가라’ 같은 전단이 가득 붙어 있었다. 이케다 총리와 나는 각각 양국을 대표해 기조연설을 했다. 행사가 끝난 뒤 이케다 총리와 차를 한잔하면서 정색을 하고 ‘일본의 한국 분단 책임론’을 제기했다.

일본을 근대화한 메이지 유신(1868년)의 주역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78년).

 45년 7월 26일 연합국인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후에 애틀리로 교체), 소련의 스탈린 원수는 독일 포츠담에서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회담을 했다. 일본은 8월 10일 포츠담 회담의 결과를 수용했다 뒤집기를 거듭했고 미국은 8월 14일에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였다.

“포츠담 회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보름 가까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육군이 ‘우리 다 죽자’ ‘죽창 갖고 싸우자’ ‘1억 옥쇄(玉碎)’ 같은 쓸데없는 소리들로 일본말로 마케오시미(まけおしみ·진 것을 인정하지 않고 억지 쓰는 일)하면서 황금 같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때 앞날을 내다보는 결단력 있는 지도자가 있었다면 연합국의 요구를 즉각 수용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지도(8월 6일·나가사키 원폭은 8월 9일),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8월 8일)도 급조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련은 만주, 북한에 진출해 한반도를 양단(兩斷)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폭 투하는 일본이 자초(自招)한 것이다.”

 나는 거침없이 얘기했고 이케다는 쓴웃음을 지으며 듣고만 있었다. 내 얘기가 그의 머리에 깊이 박힌 것 같았다. ‘이런 자가 한국에 있었구나. 그러니까 혁명을 했겠지’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강조했던 건 선견지명을 지닌 결단력 있는 지도자의 중요성이었다. 역사라는 게 누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피해가 나타나게 돼 있다는 얘기였다. “당신네 나라에서 그때 그런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국교를 정상화하는 데 그동안 우리의 고통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돈 좀 많이 내라”고 호소했다.

 이케다 총리는 한동안 나를 쳐다보다가 “대단히 실례지만 지금 연세가 몇이냐”고 물었다. 내가 “서른여섯”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지사(志士)를 보는 것 같다. 감복했다”라고 말했다.

이케다 총리는 당시 예순셋, 나보다 27살이 많았다. 나는 지사라는 말에 흥미를 느껴 “지사 중에 누구를 비유하느냐”고 되물었더니 “오쿠보 도시미치”라고 했다.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메이지 유신 때 사쓰마번(薩摩藩·지금의 가고시마현) 출신 전략가다. 도쿠가와 막부체제 타도에 나설 때 그의 나이가 서른여섯이었다. 일본 역사에선 ‘유신3걸(傑)’ 중 한 명으로 꼽히는데 출근하는 인력거에서 정적이 보낸 자객들한테 암살당했다. 오쿠보의 뒤를 이어 유신을 마무리한 사람이 유신의 초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朴文)다.

 내가 청구권 협상을 위해 일본의 정계 실력자 대여섯 명을 집중적으로 만났는데 이 중에서 제일 역할을 많이 한 건 이케다 총리였다. ‘김-오히라 메모’의 당사자인 오히라 외상도 중요했지만 그는 역시 이케다 총리의 영향권 안에서 나와 협상을 했던 것이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1899~1965)= 제 5·6·7차 한·일 회담 당시 일본 총리(1960~64년). 히로시마 출신으로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했다. 1925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대장성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재무·통산장관을 지내고 1960년 자민당 총재에 취임, 같은 해 총리에 올랐다. 일본 고도성장의 기초를 닦고, 안보조약을 기본노선으로 하는 친미정책을 추진했다. 김종필 중정부장과 비밀회동에 이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정상회담을 통해 한·일 회담에 속도를 냈다.

● 소사전 평화선(平和線)= 19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연안수역의 수자원과 광물을 보호하기 위해 바다 위에 그은 해양주권선. 독도를 포함해 해안에서 평균 60마일(약 97㎞)까지를 배타적 수역으로 선포했다. 어업 기술이 월등한 일본과 어업분쟁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 어선의 불법조업이 빈발했다. 65년 3월까지 평화선을 침범한 어선 328척이 나포되고 일본 어부 3929명이 감금·억류됐다. 평화선은 한·일 협상 과정에서 한국 측 카드로 활용됐다. 일본은 평화선을 ‘이승만 라인’으로 불렀다. 일방적으로 그어졌다며 국제법상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JP 육성증언 영상(25) “욕할테면 욕해라. 한일회담 위해 현해탄을 건너다”

-김종필 전 총리=1951년에 그랬던 것을(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61년까지 하나도 진전을 못 시킨 것은. 뭐 일본은 더 이상 진전시키면 자기네 불리하다 생각했는지,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한국 측 대사는 말 잘못하면 매국노라고 맞을 테니까. 그저 만나서 쓸데없는 소리나 교환하면서 10년을 지낸 거야, 10년을. 10년이 짧은 기간이야? 그래, 내가 혁명까지 한 놈이 욕할 테면 욕해라.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움직인다. 그러고서 내가 갔어. 그러고서 다리를 놨잖아. 내가 왔으니까 당신은 당신 특사를 임명해서 친서를 (박정희) 대통령한테 전해주기 바란다. (박정희) 대통령이 11월에 케네디 대통령 초청을 받고 미국 가니까 그때 동경서 이제 10년만에 참다운, 회담을 위한 회담이 아니라 해결하기 위한 회담을 처음 벌여 달라. 그런 거야. 이제까지는 10년 동안 회담을 위한 회담을 했어. 아무 책임도 없고 시간만 보내고. 그런데 이제 양국 수뇌가 만나서 약속을 하면 이제부터 해결을 위한 회담이 된다. 그런 생각에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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