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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포커스] 전선 불려간 아버지 행방불명 … 대공포병 어머니 배급 빵으로 버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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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할머니에 안긴 스테판 소스닌(둘째줄 왼쪽 두번째)이 외증조할머니·이모 등 외가집 식구들과 1940년 율리아놉스크에서 찍은 사진. [소스닌 가족 앨범]

작곡가 스테판 소스닌은 제2차 대전 전쟁통의 화염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폭격, 대피소, 굶주림, 대공포병 어머니 그리고 포대 전체를 위해 노래를 불렀던 기억들로 뒤섞여 있다. Russia포커스가 그의 어린 시절 추억을 공개한다.

전쟁 전 소스닌의 가족에겐 작업실이 있었다. 부모가 다 볼쇼이 극장의 무대 미술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1년 아버지는 전선으로 불려갔고 그 해에 아버지가 행방불명됐다는 통보가 왔다. 소스닌이 네살때였다. “어머니가 내게 그렇게 말했어요. 어머니는 당시 모스크바의 하늘을 지키는 대공포병이었지요.” 대피호에서의 고된 삶을 그는 단편소설이 아니라 실제 체험으로 알게 됐다.

◆공기 중의 그 무엇=그는 사이렌 소리, 그리고 할머니가 “빨리, 빨리”라고 재촉하던 것을 기억한다. 소스닌과 할머니는 밤마다 방공호로 내려갔다. “걸어가는데 폭격소리가 들렸어요. 우리 집 창문엔 종이를 발랐는데 유리가 깨지지 말라고 그런 거예요. 그 땐 모든 집이 다 그랬어요.”

그의 전쟁 기억은 단편적이다. 전쟁이 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공기 중에 뭔가 모두를 불안하게 했던 것이 떠돌았던 것은 확실히 기억한다. 도시 위를 저공 비행하던 독일 비행기만은 아니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어요. 사람들은 지하 방공호에 앉아 있었고 모두 겁에 질려 있었어요. 나는 그 때 너무 어려서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지는 못했지만…”

독일 폭격기에 대항하기 위해 비행단이 구성됐다. 비행을 방해하는 ‘작은 백학들’과 대공포 사단이었다. 여자들은 이 부대 설비의 위치탐지기를 조종해 이동하는 독일 비행기의 위치를 파악했다.

“어머니는 이런 포대의 한 곳에서 복무했어요. 나와 할머니는 1941년 11~12월 울랴놉스크(모스크바에서 890km)의 이모들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모들에겐 이미 부양할 아이들이 여럿이었는데 나는 9번 째가 됐어요. 상상이 됩니까?”

늘 배가 고팠다. 주린 배를 구원해 준 것은 식량배급 카드였는데 가족 중 두 여성이 일을 해서 받아오는 거였다.

“아이들 중 하나에게 임무가 맡겨졌어요. 누구에게도 더 많이 가지 않도록 빵을 고르게 자르는 것이었지요. 모두들 작은 빵 조각을 하나씩 받았어요. 먹을 게 부족해 늘 먹고 싶었지요. 감자껍질까지 먹어치웠어요.”

소스닌과 할머니는 1943년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직접 올 수 있는 길이 없어 ‘겨우 겨우’ 왔다. 먼저 볼가강을 따라 배를 탔고, 다음엔 할머니와 전선으로 병사들을 실어 나르는 기차에 탔다(다른 기차는 찾기 힘들었다). 할머니는 어린 소스닌을 의자 아래로 숨겼다. 모스크바 근처에서 콩나물 시루 같은 화물차로 갈아 타는데 성공한 할머니와 소스닌은 마침내 8m짜리 방이 있는 모스크바의 아파트에 도달했다.

1943년에 들어오면 모스크바 상공으로 출현하는 독일 비행기는 없었지만, 대공사단에는 ‘아무데로 흩어지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소스닌의 어머니(가족 아닌가)는 계속 대피호에서 살았다.

대피호는 땅을 판 뒤 사방을 통나무로 둘러싸고 이어 지붕을 얹고 흙을 덮어 눈에 띄지 않게 만들었다. 소스닌과 어머니는 1944년까지 여기서 살았다.

◆유쾌한 삶=이때쯤 되면 대공 대공포는 이미 군사외 목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작전이 승리할 때마다 반드시 대공포로 예포를 발사해 축하했다. 더 멀리 갈수록(진격할수록) 예포(소리)가 더 커졌다. “대공포가 달린 미국산 ‘스튜드베이커(Studebaker)트럭에 어머니와 타고 있을 때가 잊혀지지 않아요. 예포를 쏘았는데 모든 게 흔들리고 굉음이 울렸어요. 그야말로 폭발이었어요. 실제 포탄을 장전했거든요. 너무 무서웠지만 그곳에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지요.”

소스닌은 “당시 삶은 이미 대체로 유쾌해져 있었다”고 추억한다. (누가)사과를 따오라며 소스닌을, 경비가 감시하고 있는 티미랴제프 아카데미의 과수원으로 보내기도 했다. 소스닌은 나무로 기어 올라가 사과를 훔쳤다.

“커다란 종이에 영화를 상영했던 장면이 기억 납니다. 남녀의 사랑에 관한 것 같아요. 전쟁 노래를 불렀던 것도 생각나고요. 병사들은 나한테 노래를 부르라고 했어요. 나는 전화로 다른 포대에 노래를 불러줬지요. 당시엔 부대 사이에 전화통신이 있었거든요.”

전쟁이 끝날 때쯤 이미 소스닌은 우연히 라디오에서 모집 소식을 듣고 합창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대피호에서 학교에 다녔고, 그 후에는 기숙사에 배정됐다. “우리 대피호가 있던 들판은 지금도 남아있고, 비어있다. 옆으로 트램 노선이 있는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대공포대가 있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스테판 소스닌=1937년 5월 5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3살 무렵부터 전쟁을 겪었던 그는 대공포병으로 전쟁에 나섰던 어머니 동료들이 그의 재능을 발견했다. 6~7살 무렵 작곡을 하기 시작한 그는 전쟁이 끝날 때쯤 모스크바 국립 합창학교에 입학한 후 지금까지 작곡가로 활동중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일선에 편지’, ‘모스크바 여고사포병 탱고’ 등 전쟁 테마의 노래가 많다.

예카테리나 시넬시코바

본 기사는 [러시스카야 가제타(Rossyskaya Gazeta), 러시아]가 제작·발간합니다. 중앙일보는 배포만 담당합니다. 따라서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러시스카야 가제타]에 있습니다.

또한 Russia포커스 웹사이트(http://russiafocus.c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곡가 소스닌이 겪은 2차 대전
당시 4살 … 밤마다 방공호 피신
굶주림에 감자껍질까지 먹어 치워
병사 앞에서 노래 불러 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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