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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린뱌오 대결은 환자끼리의 싸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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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호 29면

마오쩌둥과 린뱌오는 문혁 때문에 가까워지고 문혁 때문에 멀어졌다. 문혁 초기, 중국을 방문한 북한 부수상 박성철(왼쪽)을 맞이하는 마오(가운데)와 린뱌오. [사진 김명호]

중국은 보안이 철저한 나라다. 중국인은 속이 깊다. 알아도 모른 체 하기를 잘한다. 그러다 보니 음흉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장쩌민(江澤民·강택민) 집권 시절, 미국에서 전용기를 구입한 적이 있었다. 인도 받은 후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도청장치가 백여 개 발견됐다. 중국은 이런 일로 대미관계에 금이 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미국에 항의하는 대신, 엉뚱한 소문을 국제사회에 퍼뜨렸다. “총리 리펑(李鵬·이붕)이 장쩌민의 전용기에 도청장치를 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23>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린뱌오(林彪·임표)의 공격수들이 국가주석제도 유지와 폐지를 놓고 치고받은, 중공 제 9차 대표자 대회 두 번째 회의도 보안이 굉장했다. 1970년 8월 20일, 중공 중앙은 전국의 중앙위원 155명과 후보위원 100명에게 극비전문을 보냈다. 회의 장소와 시간은 극소수에게만 통보했다. “한 곳에 집합시킨 후, 개막 일자와 장소를 고지해라. 전용기나 특별열차 편으로 뤼산(廬山)까지 이동한다. 보좌관들에게도 행선지를 밝히지 마라. 각자 두꺼운 솜옷을 준비해라. 주석의 명령이다.” 중앙위원 중에는 군인들이 많았다. 워낙 비밀을 요하고, 겨울 옷까지 준비하라는 바람에, 다들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줄 알았다.

마오쩌둥은 부총리 지덩쿠이(紀登奎·기등규)와 총참모장 황용셩(黃永勝·황영승)에게 베이징을 맡기고 뤼산으로 향했다. 린뱌오도 예췬(葉群·엽군)과 함께 우파셴(吳法憲·오법헌), 리쭤펑(李作鵬·이작붕), 치우후이쭤(邱會作·구회작)를 대동하고 베이징을 떠났다. 8월 23일, 뤼산극장에서 첫 번째 회의가 열렸다.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헌법 개정과 경제계획, 전비태세 등 토론 주제를 선포했다. 헌법 개정은 국가주석제 폐지를 의미했다.

린뱌오 사망 후 30여년 간, 중국 정부가 주장해온 “린뱌오집단 반역행위”의 중요한 죄목은 국가주석에 관한 문제였다. “마오쩌둥은 여러 차례 국가주석제 폐지를 천명했다. 린뱌오는 마오의 속내를 뻔히 알면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뤼산회의 한 달 전, 예췬은 우파셴에게 국가주석제를 폐지시키면 린뱌오는 갈 곳이 없다는 말을 했다.”

린뱌오 대신 공격수로 나섰다가 몰락한 천보다(陳伯達·진백달)는 훗날 정부 주장과 상반되는 구술을 남겼다. “나는 마오 주석이 여섯 차례 국가주석제 폐지를 주장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마오 주석도 국가주석제를 반대하지 않았다. 중국은 농민이 많다며 국가주석에 합당한 사람은 천잉꾸이(陳永貴·진영구) 외에는 없다는 말은 자주했다. 회의 개막 전, 린뱌오와 마오 주석은 방 안에서 밀담을 나눴다. 저우언라이와 나는 옆방에서 기다렸다. 서로 눈치를 보느라 엿들을 수도 없었다.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나오자 회의가 시작됐다. 예정에 없던 린뱌오가 첫 번째 발언을 했다. 원고를 준비한 사람 같지 않았다. 산회 후, 린뱌오에게 다가갔다. 주석과 의논했느냐고 물었더니 주석도 아는 내용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파셴도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국가주석에 관한 의견들이 분분했다. 린뱌오 혼자 국가주석제를 고집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뤼산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대노한 것은 국가주석 때문이 아니었다. 많은 참석자들이 부인 장칭(江靑·강청)을 호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꼴 보기 싫어도, 배우자가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보고 기분 좋아할 사람은 세상천지에 없다. 상대가 마오쩌둥이다 보니 주석도 나이가 들면서 판단이 흐려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국가주석을 탐낸다고 의심했지만, 린뱌오의 생각은 확고했다. “중국은 인구 10억의 대국이다. 하루도 국가원수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나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다. 자격은 마오 주석 외에는 없다. 국가주석은 출국할 일이 많다. 외국 국가원수가 방문하면 답방도 해야 한다. 마오 주석은 연로하다. 출국에 문제가 많다. 부주석이 대행해야 한다. 나는 부주석도 적합하지 않다. 건강이 엉망이기 때문이다. 내 몸은 상처투성이다.”

실제로 린뱌오는 환자였다. 비서들의 증언도 한결같다. “린뱌오는 일년에 발을 두번 닦았다. 물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면전에서 비서들이 서류 넘기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바람도 무서워했다. 고기는 물론이고, 생선이나 해산물도 입에 대지 않았다. 과일도 먹지 않았다. 집무실도 없고, 실내에 전화기도 없었다. 예췬과 같은 방도 쓰지 않았다. 가까이 오면 슬금슬금 피하기 일쑤였다. 이게 환자가 아니면 뭐가 환자냐.”

문혁의 중심에 있으면서 문혁을 조롱했다. “이건 무화대혁명(武化大革命)이지 무슨 놈에 문화대혁명이냐.” 예췬도 “린뱌온지 뭔지 하는 인간이 내 청춘을 망가트렸다”는 일기를 남길 정도였다. 말년의 마오쩌둥도 환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치유가 불가능한 의심병 환자였다.

병부치국(病父治國), 환자들의 통치는 동북아의 오랜 전통이었다. 멀쩡한 사람도 대권만 거머쥐면 서서히 환자로 변해갔다. 마오와 린뱌오의 대결은 환자들끼리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복잡하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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