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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는 퇴근 후 프로젝트 연극하는 중년의 프로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여성중앙] Time Poor or Rich "당신도 시간 빈곤자인가요?"

‘리시스트라테’ 카메오팀은… (왼쪽부터) 동국대 영문과 교수 황훈성, 펀드 매니저 이성진, 비올리스트 김남중, 피부과 원장 조미경, 주얼리 디자이너 이정순, 헤어 디자이너 박종원, 세종대 연극영화과 교수 송현옥, 탑금속 부사장 유경내, 국립중앙의료원 건강검진 센터장 허원실, 중부대 호텔경영학과 교수 이애리, 전 갤러리 관장 임영신, 호텔리어 하종웅이 모인 프로젝트 연극 모임이다.

평일 오후 9시 서울 대학로 소극장. 펀드 매니저, CEO, 의사, 교수, 호텔리어 등 바쁘기로 소문난 각계각층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연극 ‘리시스트라테’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다. 물론 이들이 주연은 아니다. 연극 무대 위에서 춤과 노래, 표정 연기와 짧은 대사를 선보이는 카메오로 나선다.

평일 오후 8시가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무대 위에서 스탠바이를 해야 하는 것이 연극배우의 기본. 하지만 출퇴근 시간이 자유롭지 않고 야근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부지기수인 이들이 어떻게 매일 연극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일까. 이들이 카메오로 극의 감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한 건 세종대학교 극단 ‘물결’ 대표이자 연극영화과 교수 송현옥씨였다.

“연극의 무대가 객석과 더 가까워지고 경계가 허물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객석에 있는 사람도 나와서 같이 무대를 즐기면 어떨까 했죠. 그래서 평소 연극을 해보지 않았지만 관심이 있거나 뜻이 맞는 분들을 섭외한 거예요.”

지난 3월 10일 막을 올린 연극 ‘리시스트라테’. 이들은 공연 시작 한 달 전부터 연습을 시작했고, 상연 일주일 전부터는 리허설을 진행했다. 주중 주말 없이 일하고, 밤낮없이 일을 해야 하는 이들이 평일 저녁에 치러지는 정기 연습과 공연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는데도 출석률은 꽤 좋았다.

그 중 펀드 매니저 이성진씨, 중부대 교수 이애리씨, 호텔리어 하종웅씨의 출석률이 가장 높았다. 이성진씨에게 연극은 결코 쉬운 도전이 아니었다. “많이 망설였어요. 저녁 연습에도 나와야 하고 정기적으로 무대에 올라야 하고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퇴근이 늦어질 때가 태반이고 따로 연습할 시간도 마땅치 않고요.”

고민 끝에 동참하기로 했지만 내내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연습과 리허설을 네댓 번 하면서 점점 몰입해갔다. “언젠가부터 부담감이 자신감으로 바뀌었어요. 이제 제게 대학로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오는 출입문이 됐어요. 일상을 떠나 판타지 같은 곳으로 들어온 거죠. 연극을 하고나니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중부대학교 호텔경영학과 이애리 교수는 하루를 촘촘하게 쪼개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다. “20년간 스케줄을 빼곡히 채우며 살았어요. 쉬는 틈이 생길 땐 민화, 음악, 운동, 연극 등을 배우며 무엇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렸죠.”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추천하는 것은 ‘연극’이다. 여기에 모인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을 섭외한 것도 그녀였다. 그녀의 하루는 대개 오전 6시에 시작된다. 평일에는 학교로 출근을 하고, 퇴근하면 아슬아슬하게 공연 시작 시간에 맞춰 대학로 극장 무대에 오르는 것이 요즘 스케줄.

“예전에는 시간별로 할 일을 써놓고 수행한 일들을 체크하고 넘어갔는데, 그런 생활을 20년 정도 하니 그것도 필요 없어졌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저절로 머릿속에 일정이 박히죠.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구체적인 계획의 그림을 그려 생활하는 거예요.”

그녀의 소개로 연극에 함께하게 된 호텔리어 하종웅씨는 직장인, 특히 밤낮 구분 없이 일해야 하는 호텔리어라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처음엔 거절했어요. 지금 하는 일도 많은데 새로운 일을 벌일 용기가 안 났죠. 매일 시간 내서 연습하러 오는 것도 힘들었고요. 하지만 도전해보고픈 마음에 주말에만 참여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번 하게 되니 주말 주중 상관없이 가능한 대로 많이 찾아오고 싶어지더라고요. 애써 노력해서 시간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거예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숨은 끼를 발견하고, 도전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자 바쁜 시간을 쪼갤만큼 연극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쁜 일상생활 속에 굳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한 연극은 참 잘한 선택이었다. 피부과 원장 조미경씨는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동시에 의사를 위한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매달 발행하고 있다.

“병원에 하루 종일 있는 날이 많아요. 그런데 나중에 결국 은퇴를 하게 될 텐데, 충분히 놀지 못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하면 은퇴 후의 생활이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지금부터 다양한 경험을 해서 은퇴 후에도 재미있고 가치 있게 살고 싶었어요.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일단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안 해본 일에 대해 후회하는 게 싫어요. 이것저것 경험하면서 후회 없이 살고 싶어요. 바쁘다는 건 어찌 보면 핑계일지 몰라요.”

이들이 입 모아 하는 이야기는 한 가지였다. 바쁜 와중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보라는 것. 짬짬이 틈을 만들어 도전해 이뤄내면 분명 새롭게 얻는 것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연극에 함께 출연하는 주얼리 디자이너 이정순씨가 이런 말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하기엔 너무 바쁘다’고 해요.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까’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면’ ‘시간 나면 한번 해봐야지’ 등등 이유를 만들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네 인생에 바쁘지 않은 날 없고 별일 없는 날이 없어요. 업무를 미루면 다음 날 하면 되는데, 자기 인생의 일을 미뤄버리면 언제 다시 올지는 아무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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