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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침묵으로 더 많은 말을 하는 배우. 브래들리 쿠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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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현재 브래들리 쿠퍼(40)는 연기 인생의 전성기를 달리는 듯 보인다. 10년 전만 해도 로맨틱물에서 남자 주인공의 친구 역을 도맡던 그가 최근 3년 연속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 데이비드 O 러셀 감독)’ ‘아메리칸 허슬’(2013, 데이비드 O 러셀 감독) ‘아메리칸 스나이퍼’ (1월 14일 개봉,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에서다. 4월 23일 개봉하는 ‘세레나’(원제 Serena, 수잔 비에르 감독)에서도 그는 색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이젠 배우로서의 성공을 넘어 감독 데뷔까지 앞두고 있다. 그는 과연 어떻게 진화를 거듭해 연기 인생의 부흥기를 맞이한 것일까.

세레나

착한 남자 이미지의 조연 시절

새파란 눈동자에 부드러운 인상, 다부진 체격. 치명적인 섹시함보다는 다정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남자. ‘달콤한 백수와 사랑 만들기’(2006, 톰 듀이 감독) ‘예스맨’(2008, 페리튼 리드 감독) 등에 주인공 친구로 출연했던 브래들리 쿠퍼의 이미지다. 착한 남자 이미지는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그 시작은 출세작인 TV 드라마 ‘앨리어스’(2001~2006)다. 쿠퍼는 주인공인 CIA 요원 시드니(제니퍼 가너)의 곁을 지키는 다정한 친구 윌 피틴을 연기했다. 1999년 데뷔해 여러 TV 드라마의 단역부터 케이블 TV의 오지 체험 프로그램까지 출연했던 무명 배우 쿠퍼에게 피틴 역은 족쇄가 됐다. 이후 도약의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은 것이다. 이즈음 쿠퍼는 술과 약에 빠졌다. 늦잠을 자다 오디션에 늦었고, 술을 마시다 스스로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찧기까지 했다. 쿠퍼는 이 시절을 “인생의 바닥을 치던 시기”라고 돌이킨다.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은 ‘웨딩 크래셔’(2005, 데이비드 돕킨 감독)와 연극 ‘3일간의 비’(원제 Three Days of Rain)다. ‘웨딩 크래셔’에서 그는 겉과 속이 다른 속물 색의 야비한 모습을 감칠맛 나게 연기해 주목받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착한 이미지 탓에 역할을 따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 작품 후엔 ‘브래들리? 아, 그 나쁜 놈’ 이러더라. 나를 완전히 바꿔준 작품이다.” 그는 2006년 연극 ‘3일간의 비’에 출연해 10여 분의 긴 독백 연기 등을 소화하며 연기에 대한 초심을 다졌다. “엄청난 기회였다. 이 연극이 실패했다면 나는 학교로 돌아가 문학 강의를 하며 살았을 것이다.” 미국 명문대인 조지타운대에서 문학을 전공한 쿠퍼는 대학 졸업 후 대학원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스릴러부터 코미디까지

쿠퍼는 할리우드에서 ‘훈남’ 역을 맡으면서도, 꾸준히 저예산 영화에 다양한 역할로 출연했다. 스릴러 ‘미드 나잇 미트 트레인’(2008,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 호러 ‘케이스39’(2009, 크리스티앙 알바트) 등이 그 예다. ‘미드 나잇 미트 트레인’에서 그는 살인마의 사진을 몰래 찍는 사진작가 레온의 두려움과 혼란이 뒤범벅된 표정을 생생히 그려 폭넓은 연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코미디 ‘행오버’(2009, 토드 필립스 감독)에서 가능성은 실체가 됐다. 이 작품은 총각파티에 모인 네 친구가 술에 취해 벌이는 소동극이다. 쿠퍼는 대책 없이 해맑고 뻔뻔한 필을 연기하며 유머 감각과 ‘똘끼’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행오버’는 전 세계 4억6000만 달러의 엄청난 수입을 올렸고, 쿠퍼는 흥행 배우가 됐다.

아메리칸 허슬

2011년 드디어 연기에 비약적 발전을 이룰 기회가 찾아왔다.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을 만난 것이다. “쿠퍼는 그동안 스크린에서 보여주지 않은, 깊이 있는 감정과 풍부한 경험을 가졌다.” 러셀 감독이 밝힌 그의 첫인상이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쿠퍼는 아내의 외도로 반쯤 미쳐 버린 남자 팻을 코믹하고도 절절하게 연기했다. 아침마다 까만 비닐 봉투를 뒤집어쓰고 조깅하고 데이트 상대 티파니(제니퍼 로렌스)에게 “당신보단 내가 덜 미쳤다”고 말하는, 웃기지만 안쓰러운 남자. 쿠퍼는 엉뚱하되 연민이 이는 얼굴로 팻의 상처와 희망을 그렸다. 러셀 감독과 다시 만난 ‘아메리칸 허슬’에서도 그의 매력은 다시 빛을 발했다. 쿠퍼가 연기한 리치는 사기꾼들의 현란한 말솜씨와 처세술을 동경하는 FBI 요원. 이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리치의 ‘웃픈’ 몸부림은 관객을 매료시켰다. 두 영화로 쿠퍼는 2년 연속 아카데미 시상식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무표정한 얼굴, 복잡한 감정의 결

쿠퍼의 연기는 올해 초 미국을 뜨겁게 달군 화제작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더 빛이 났다. 실존했던 전설의 저격수 크리스 카일(1974~2013)을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그는 석 달 동안 17㎏를 찌웠다. 그뿐 아니다. 적을 더 많이 죽일수록 칭송받는 전쟁터. 극도의 긴장감과 윤리적 회의감이 스치는 무표정한 얼굴, 무심하게 내뱉는 혼잣말로 쿠퍼는 카일의 감정을 섬세히 포착해 낸다. 귀국 후 카일이 트라우마를 겪는 대목은 어떤가. 어린 아들과 뒤엉켜 노는 개를 바라보다가 움찔하며 총을 집는 장면에선 그의 상흔이 섬뜩하게 전달된다. 쿠퍼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다시 이름을 올린 건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세레나’에서는 농익은 리액션 연기를 선보인다. 1929년 목재 사업가 조지는 세레나(제니퍼 로렌스)와 결혼하며 희망찬 미래를 그리지만, 사업은 수세에 몰리고 세레나는 아이를 유산한 뒤 이성을 잃는다. 극중 조지는 온갖 절망적 상황을 꼼짝없이 감당해내는 인물이다. 쿠퍼는 조지가 느낀 당혹감, 절망감, 불안을 특유의 평범한 듯 부드러운 얼굴에 세심하게 새긴다. 자신을 배신한 직원을 우발적으로 죽이고 망연자실하는 모습부터 유산한 세레나의 독기 어린 신경질에 흠칫 놀라는 모습까지.

쿠퍼는 여러 인터뷰에서 “술과 약에 중독됐고, 열심히 해도 빛을 보지 못했던 무명 시절이 나를 발전하게 한 토대”라고 말한다. 열여덟 살에 영문학 학사를 땄던 모범생에서 조연만 줄기차게 맡던 배우로, 그 다음엔 절제된 표현만으로 복잡한 감정을 포착하는 연기파 배우로. 그는 자신의 미개척지를 찾아 끊임없이 도약했다. 쿠퍼의 다음 과제는 영화 연출이다. 최근 고전영화 ‘스타 탄생’(1937, 윌리엄 웰먼 감독)의 리메이크작의 연출을 맡았다. ‘행오버’ 촬영 땐 자진해서 편집실을 지켰고, 영화 제작에 자주 참여해 온 사실을 감안하면 놀랍지 않은 행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찍을 때 쿠퍼는 영화 현장의 모든 걸 알고 싶어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그의 눈을 봤다. 꼭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더라.” 배우 출신의 거장 감독 클린트 이스트 우드의 말이다.

글=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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