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진 수요일] 청춘리포트 - 직장인들, 영어가 뭐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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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한국인에게 영어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숙제와 같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도 영어 공부에 대한 압박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어로 미팅을 하거나 전화통화라도 하려면 일단 겁부터 납니다. 승진·이직을 대비해 토익 등 영어 시험 점수를 관리해야 한다는 중압감도 큽니다. 청춘리포트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영어 스트레스 지수(ESI·English Stress Index)를 개발했습니다. 2030 직장인의 ESI는 어느 정도일까요. 스트레스를 넘어 영어 공포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취재했습니다.  

영문으로 빼곡한 e메일을 받고 머리를 쥐어뜯거나 외국인 파트너를 상대로 더듬더듬 미팅을 진행했던 경험…. 20~30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겪어 봤을 일들이다. 초·중·고를 거쳐 대학에서까지 누구보다도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는데 왜 영어만 마주치면 진땀을 흘리는 걸까.

 청춘리포트가 2030 남녀 직장인 200명을 상대로 ESI를 측정해 봤다. ESI는 직장에서 느끼는 영어 스트레스의 정도를 0점부터 100점까지 점수화한 지표다. ESI 항목은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와 이근철 이근철영어문화연구소 소장 등 전문가의 검토 과정을 거쳐 완성됐다. 영어 스트레스가 높을수록 1단계에서 4단계까지 올라간다. 보통 3단계의 기준점인 50점 이상부터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상당한 것으로 풀이된다.

  조사 결과 직장인 200명의 평균 ESI는 56.2점이었다. 대다수가 회사 생활에서 느끼는 영어 부담감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특히 조사 대상자 가운데 55%가 평균 이상의 영어 스트레스를 겪는 3단계에 해당됐다. 최고 수준의 영어 스트레스인 4단계에 속한 비율도 11%에 달했다.

 2030 직장인들의 영어 스트레스는 어떤 형태로 표출될까. 자칭 ‘영어 공포증’ 환자라고 주장하는 직장인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그 유형을 나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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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형 >> 대기업 건설사에 근무 중인 K(32)는 지난해 9월 외국 바이어들과 미팅을 했다. 평소 철두철미한 K답게 미리 준비해 놓은 자료를 읽어 가며 순조롭게 일이 진행됐다. 미팅이 끝난 뒤 상사가 K를 불렀다. “저녁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에 이분들 먼저 모시고 가.”

 그때부터 악몽이 시작됐다. 업무 관련 대화가 끝나자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었다. 상대방이 영어로 질문을 하면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버벅댔다. 얼굴이 새하얘진 K를 본 동료가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사실 속이 안 좋아 . 많이 힘드네.” 사정을 전해 들은 상사가 자비롭게도 K의 귀가를 허락했다.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온 K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K는 “ 그날 이후 영어 관련 업무가 떨어지면 각종 핑계를 대며 피해 다닌다”고 말했다.

벼락치기형 >> 잡지사 기자인 L(29)은 한 영화제 관계자로부터 외국에서 온 유명 영화감독을 인터뷰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단독 인터뷰’라는 생각에 솔깃한 L은 바로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영화제 관계자가 먼저 제안했으니 통역도 따라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터뷰 하루 전 통역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자님, 영어 잘하시죠? 혹시 통역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못하겠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L의 영어 벼락치기가 시작됐다. 밤새 번역기를 돌리고 사전을 찾아가며 질문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달달 외웠다. 인터뷰 시간이 다가올수록 걱정이 밀려왔다. ‘질문을 하면 뭐해, 한 번에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녹음해 놓고 나중에 들어보면서 써도 되지만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결국 L은 영화 관계자에게 말했다. 최대한 도도한 척하며 이렇게. “제가 웬만한 건 알아서 할 텐데, 혹시라도 막히는 게 있으면 조금만 도와주세요.”

노예형 >> 국내 굴지의 대기업 직원 Y(33)는 오늘도 ‘열공’ 중이다. ‘대리’로 진급을 앞두고 있는데 영어가 걸림돌이었다. 그의 회사에선 회사가 만든 자체 영어 시험 점수가 승진에 가산점이 된다. 동료들은 스터디그룹까지 만들어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일도 많은데 끝나고 영어 공부까지 하려니 생전 안 흘리던 코피까지 흘렸다.

 또 다른 직장인 S(30)는 매년 빠지지 않고 토익스피킹 시험을 본다. 감을 잃게 될까 봐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다. 토익스피킹이 ‘6’ 이상은 나와야 승진 요건에 부합된다. 멈추면 그만큼 뒤처진다는 생각에 1년째 ‘전화영어’ 수업도 듣고 있다. 남들 눈에는 자기 계발을 위한 유익한 시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S에게는 ‘생존 본능’에 가깝다. ‘그놈의’ 영어 때문에 신경쇠약까지 걸릴 지경이다.

#영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면?

 이병민 교수는 “영어를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직종은 일부임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청춘리포트 조사에 따르면 하루에 영어를 한마디도 쓰지 않는다는 응답이 38.3%로 가장 많았다. 이근철 소장은 “자신의 영어 수준을 정확히 인식하고 정답으로 말해야 한다는 부담을 버려야 영어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정강현 청춘리포트팀장 foneo@joongang.co.kr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1단계 0~19점
“영어공포증이 뭐예요?”

영어에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당신. 굉장한 영어 실력을 가졌거나, 아니면 영어에 큰 미련이 없거나. ‘발음·문법 좀 틀리면 어때? 말만 통하면 되지! ’ 이런 사람일수록 배움의 자세도 열려 있다. ‘살짝 나태한 거 아니야?’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당신의 그 멘털, 모두가 부러워하리. 

2단계 20~49점
“그 정도 스트레스야 늘 있지”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는 있지만 그걸 받아들일 줄 아는 당신. 외국인과 일적으로 맞닥뜨리는 상황, 뭐 크게 반갑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뭐, 이것 또한 수많은 업무 스트레스 중 하나일 뿐이라며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당신. 베테랑 직장인 다 됐다.

3단계 50~79점
“다들 나보다 잘하네 ㅠㅠ ”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제법 큰 당신. 뭐, 몇 마디 하긴 하겠는데 주위 사람들 눈치가 좀 신경 쓰여야지. 발음이며 문법이며 다들 내 입만 쳐다보는 것 같잖아. 늘 남들 사이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는 당신. 위로 한마디 건네자면 다들 나보다 영어를 잘할 것 같아도 정말 특출 난 사람이 아니라면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거. 영어 전문가들이 그러더라.

4단계 80점 이상
“영어만 생각하면 아파요”

외국인과의 미팅, 영어 프레젠테이션만 앞두면 자꾸 화장실에 가고 싶고 손에 땀이 나는 당신. 일단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본다. 그러면서 '난 이래서 안 돼" 하며 머리를 쥐어박는다. 영어가 당신의 평판에 엄청난 영향을 줄거라고 생각하낟. 그럴수록 '현재 업무에서 영어가 얼마나 필요한지' 냉정히 따져봐라. 당신 생각보다 중요한 부분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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