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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승희의 시시각각

부패보다 무능이 더 두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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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승희
박승희 기자 중앙일보 중앙선데이 국장
박승희
정치부장

국제대회만 나가면 펄펄 나는 선수가 있다. 이런 선수를 ‘국제용’이라고 표현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국제용에 가깝다. 그제(18일) 노벨 문학상을 탄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나라에서 한 발언이 그렇다. 콜롬비아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마르케스의 말을 스페인어로 인용했다. “가슴을 가진 사람에게 망각은 어렵다(Olvidar es dificil para el que tiene corazon)”. 콜롬비아가 6·25 때 파병해준 데 대해 잊지 않고 감사한다는 말이었다. 마르케스를 존경하는 콜롬비아인들은 박 대통령에게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국내 정치는 혼돈 속이다. 포털 사이트의 ‘많이 본 뉴스’ 분류에서 ‘남성들’은 성완종 리스트에 개탄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세월호 사고 1년의 슬픔과 허허로움에 빠져 있다. 마르케스의 위로는 국내에 더 절실하다. 성완종 리스트가 몰고 온 해일이 심각한 건 그 끝을 모른다는 거다. 청와대도, 야당도, 검찰도 고개를 젓는다. 총리·대통령 비서실장, 그리고 정부의 실세들은 감당할 수 없는 속사정으로 쩔쩔매고 있다.

 사정(司正) 선포→별건수사 논란→정치인 리스트 폭로→역풍→쇄신→시작과 전혀 다른 결말. 돌아보면 국정 공백을 부른 재생드라마의 시작은 진부했다.

 총리가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3월의 목요일(12일)이었다. 여론은 뜬금없어 했다. 하지만 닷새 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비리의 덩어리를 들어내야 한다”고 힘을 줬다. 총리의 말은 뜬금있어졌다. “부정부패 척결은 검찰 본연의 사명”(17일, 김진태 검찰총장)이란 ‘복창’이 뒤따랐다. 공교롭게도 하루 뒤(18일) 성완종의 집과 경남기업 본사는 압수수색을 당했다. ‘비리의 덩어리를 들어내야 하는’ 검찰의 서슬 앞에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시대를 실세들과의 친분으로 견뎌온 ‘정치기업인’은 스물 하루를 숨 졸이다가 죽음을 택했다. 그는 쪽지와 육성 증언이라는 정교한 시한폭탄을 남겼다. 그 폭탄은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 쪽에 던져졌다.

 시중 여론은 흔히 보수를 부패하다고, 진보를 무능하다고 말한다. 진보가 아닌데도 위기를 맞은 이 정부의 실력은 미덥지 않다.

 ①비리 덩어리를 들어내라고 한 3월 12일.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김무성·문재인 대표와 3인 회동을 했다. 그러곤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에 협조해 달라고 호소했다. “경제 한번 살려보겠다는 마음을 알아 달라”고도 했다. 이 발언을 전한 사람은 대통령이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했다. ②중남미 순방을 위해 출국하던 날 대통령은 여당 대표를 만났다. 여당 대표는 총리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세상 인심을 전했다. 대통령은 “부정부패를 뿌리 뽑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공무원연금 개혁과 일자리 창출법안을 4월 국회에서 처리해 달라는 당부도 했다(중략).

 사정 정국으로 여의도에 불을 질러 놓고 4월 국회에서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를 외치는 모순은 누구 작품일까. 국정 운영의 조율사가 있기는 있는 걸까.

 한국 사회는 맷집이 강하다. 겪은 게이트도 많다. 그래도 현직 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의 이름이 동시에 등장한 건 처음이다. 민심은 흉흉하다. 이런데도 열흘 이상 나라를 비우는 대통령이 남긴 메시지는 한 달 전이나 다를 게 없었다. 이 정부에선 대통령의 화법과 현실 간의 거리가 멀어질 때마다 지지율이 떨어지곤 했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난주보다 5%포인트 하락했다(갤럽 조사). 대통령이 공감의 정치에서 멀어지면 대중의 눈엔 그 거리만큼 무능하게 비친다. 정치에서 무능은 부패보다 심각하다. 부패엔 분노하지만 무능엔 포기해버리기 때문이다. 악플보다 무플이 무서운 이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대통령은 공감의 정치를 들고 귀국해야 한다. 『백년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는 이런 말도 했다.

 “인간은 어머니 배 속에서 태어나는 날 그날 한번만 태어나는 게 아니다. 삶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새롭게 태어나도록 요구한다.”

박승희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