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36년(46)-재일한국인의 저항<제자·일중 김충현>

중앙일보

입력 1984.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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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의 절대국방권이던 사이판이 함락된 44년7월부터 항복에 이르는 45년8월까지의 1년간은 일본국민에게는 악몽의 나날이었다. 남방전선에선 패전소식이 잇따르고 B-29편대의 본토폭격으로 도시는 잿더미로 변해갔다. 이같은 절망적 상황에서도 일본의 군부 지배층은 최후의 결전을 외쳐댔다. 이것은 한국민중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제국 지배자들은 한국민중의 저항에 대한 공포때문에 한국민의 무장을 꺼렸지만 전쟁요원의 부족으로 이같은 주저를 팽개쳤다. 징용과 지원병제에 이어 44년엔 전면 징병으로바뀌었다. 국내의 한국인 지식층은 일본군부의 광기에 휩쓸려 민중을 전쟁으로 내모는데 앞장섰다.
그런 최악의 상태속에서 민족의 긍지를 지켜나간것은 민중이다. 특히 항일활동은 국내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세차게 타올랐다. 일본 경시성 특고문서속의 저항의 기록 몇가지를 옮겨보자.
◇아나키스트항일조직=조선노동조합을 통한 무정부주의자들의 활동은 엄중한 취체에 걸려 38년3월 그 조직이 무너졌으나 41년3월 일부 급진파에 의해 재건운동이 시작되었다. 문성훈등 아나키스트들은 일본은 멀지않아 패망한다는 시국진단아래 패전을 앞당기고 패전이임박했을때 닥칠 재일한국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일본의 권력중심부에 타격을 가하기로계획했다. 이들은 동경에 각계각층의 한국인 포섭을 위해 주점을 개설, 이곳을 비밀아지트로했다.

<일본권부 폭파계획>
이들은 50명선의 동지 포섭이 이루어진 41년6월 비밀결사 건달회를 결성했다. 최초의 건달회부서는 ▲서기부-문성훈·김완 ▲선전부-이종문·김석영·정갑진·김동수 ▲재정-이종식등이다.
건달회는 거사시기를 42년 봄으로 잡았다. 폭파목표물은 궁성, 참모본부, 육·해군성, 경시청등 일본권력의 중심부를 동시에 공격한다는것. 이들은 거사계획의 진전에 따라 폭파지점도 분담했다.
그에 의하면 ▲궁성-문성훈 ▲참모본부-이종식 ▲내무성-정갑진▲일본은행-이종문 ▲대장성-김석영 ▲육군성-김완 ▲해군성-김동수등-.
폭탄담당인 이종문은 화약공장에 근무하는 아나키스트 그룹의 일본인 동지였던 「사까모또」에게 교섭했으나 실패하고 여러곳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훔쳐 목표량을 확보했다. 권총담당인 이종식은 만주국 간도성의 관리로 있는 그의 부친을 통해 입수키로 했다. 이들 조직은거사준비가 반이상 진척된 42년초 특고경찰에 꼬리가 잡혀 모두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은 다이너마이트등이 압수되는 바람에 테러조직으로서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야학서 애국심고취>
◇기독교계 민족운동=주동자는 나고야동교회 목사 박상동. 32년10월 애지현의 한국인 전도사명을 띠고 나고야에 파견된 박목사는 40년4월 조선기독교회를 일본기독교회에 병합하게되자 본래의 조선교회는 친목단체로서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실지로는 민족운동 비밀결사로발전시켰다.
박목사는 일본에 건너온 이래 조선인교회 지도자들에게 중·일전쟁은 미·일전쟁으로 확대될것이며 일본은 결국 패전한다, 패전을 한국독립으로 연결시키기위해 교회가 역할을 다해야한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급격한 정치운동으로는 실패한다, 우리는 무기도, 정치수단도없고 외부의 적 못지않게 내부의 변절자가 어디에나 있다, 따라서 전도라는 합법수단을 이용,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애지현의 모든 교회에 걸쳐 조직을 완성하고 신자들을 포섭했으며 미·일전쟁으로 일본국력이 피폐해질때를 한국인 봉기시기로 잡아 그 준비를 진행해왔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42년 여름부터 고등경찰의 사찰에 걸려 그해 12월9일 모두 검거되었다. 검거되어 송청된 중심인물은 목사 박상동(의성출신) 추인봉(부여) 김은석(영주), 장노 박상봉(진양) 박영주(경주) 유야석(칠곡), 집사 우사선(영주), 그리고 평신도로 여전교수 관창석(성남) 안승락(영일) 정정달(의성)등이다. 수십명의 신도들도 연루된 재일기독교계 항일사건에 대해 특고경찰은 극비수사를 진행, 주동자 10여명을 나고야지방재판소로 송청했으나이 사건이 다른 지역 조선인교회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얼마후 모두 가석방했다.
◇오오사까계심야학교사건=주동인물 이봉춘(30·제주출신)은 33년 제주에서 독립운동을하다 구금된 경력이 있는 강림양 현봉천 이권민등과 친교, 이들의 용진야학회운동을 본떠 36년부터 오오사까의 동성구에 야학을 개설했다.

<미·일전쟁 미리점쳐>
이들의 성심야학교는 체포되던 42년10월까지 오오사까시내 11개소를 전전하며 1개소에서30명선의 재일한국인 소년소녀들에게 민족교육을 펴왔다. 이들은 독립의 노래도 만들고 교과는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중점적으로 가르쳤으며 시험발표회·망년회·신년회등의 모임을주선, 학부모들을 초대하고 우리야학은 자녀들을 훌륭한 애국자로 교육하고 있다. 학부모들도 우리의 독립을 위해 자기의 일터에서 일본에 타격을 가하는 활동을 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이 사건은 주동자 이봉춘과 야학의 교사를 한 고갑평(30) 김주삼(31) 김성종(29)만을 구속, 검찰에 송치했다.
◇오오사까소재 동아전기공업학교 중야길웅(20·동래출신) 송전동흥(17·제주출신) 산양상업학교 송산주식(19·합천출신)등은 42년7월 비밀결사를 조직, 오오사까와 히로시마지역조선인 학생규합에 나섰다.
이들은 ⓛ일본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시기에 독립쟁취를 위해 봉기해야한다 ②만주에 본부를 설치, 독립국민군을 편성한다 ③만주를 조선의 영토로 한다 ④이왕가는 매국의 책임자로 처단하고 공화국으로 독립을 실현한다는 기본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동지포섭을 분담, 길웅은 오오사까 거주 조선인 학생을, 주식은 히로시마 지역을 맡아 43년 히로시마 중학4학년으로 전학, 이학교에서 이종근등을 포섭, 비밀조직을 확대했으며 동흥은 만주진출을 모색키위해 귀국, 탈출루트를 탐색했다. 고등경찰은 44년7월 이들을 체포, 모두 송청했다.
이상의 사례들은 특고문서에 수록된 저항운동의 극히 작은 부분일뿐이다.

<단파방송듣고 전파>
동경의 전기기능공들은 단파방송을 수신, 미국과 중경의 독립운동소식을 교포들에게 알렸다. 동경에 있던 창원출신의 목사주기영도 조선기독교 청년회관과 각대학 조선유학생회에「독립지령」이란 문서를 보냈다.
경도에 있던 한국인 토목공들은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징병제를 피할수 없다면 이를일본과의 무력항쟁에 나설 실력양성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면서 징병에 동원된 이웃에게 전선에 나가게되면 탈출해 연합군에 합류하라고 했다. 이 조직의 한 토목공은 일본의 비행기로 일본군기지를 폭격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항공병지원서를 내기도 했다.
일본당국은 산발적이지만 광범한 항징때문에 한국인을 불신하고 경계했다. 북구주폭격후의 조선인 통신에 관한 특고의 조사보고서는 조선인은 폭격의 피해를 과장선전하고 있다고그 사례들을 열거하고 특별한 경계를 요한다고 했다. 그무렵 재일한국인은 2백만명을 헤아렸다.
45년2월10일 동경대공습 이래의 혼란속에서 2백만 재일한국인의 공포는 관동대진재때 겪었던 한국인 대량학살의 악몽이었다.
그런 두려움의 복판에서도 저항을 주저하지 않았다. 주목할 일은 항일대열에 중학생에서단순노무자에 이르는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지도층은 친일바빠>
아쉬운 일은 그무렵의 항일운동에서 구심점이 없었고 그때문에 뜨거운 의지들이 큰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 시기 국내지도층은 전쟁협력에 총동원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청년들의 항일운동을 이끌어주고 상호 연결시켜줄 구심점도, 지도세력도 갖지못했다.
사실 일제하에선 항쟁보다 세리를 좇아간 친일의 기록이 더많다. 그런 기록들은 일본의 몇개 자료실에 묻힌채 있다.
한국인 밀정들의 극비보고서, 한국인 유지들이 그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조선총독부 고위층에 보낸 서한이나 책략서들은 민족의 긍지를 팽개쳐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증언해주고 있다.

<잃어버린 36년은 제1부로 일단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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