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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동화로 배웠네]<14>선배를 먼저 좋아한 건 나에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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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보고 저리봐도 내스탈

# 1. 반하다

따스한 햇살이 비치던 어느 봄날, 신입생들을 상대로 한 동아리 홍보가 있는 날이었다. 동아리 부스에서 분주하게 지원서를 받던 내 눈길이 닿은 곳이 있었다. 바로 맞은편 동아리 부스에서 열심히 동아리 홍보를 하고 있는 한 남자, 유난히 파랬던 하늘에 잘 어울리는 시원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치 순정 만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정신을 차리고 홍보를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주변을 살피며 그를 찾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하루 종일 맞은편 부스에서 동아리 홍보에 열을 내고 있었다.

그를 향해 출발

하루 종일 관찰한 결과, 그는 ‘영어 토론’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게 분명했다. 복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봐서 나보다 선배로 추정됐다. 내가 속한 단과대에서는 본 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 바로 복학했거나, 다른 단과대 학생인 듯했다. 요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마음에 쏙 들었다. 인어공주가 선상 파티를 즐기는 왕자님을 보고 한눈에 반하듯, 나는 그렇게 선배에게 첫눈에 반했다.

# 2. 탐하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내가 속해 있는 동아리가 못마땅해지기 시작했다. 내 동아리는 학교 주변에 있는 밥집과 술집을 취재해 학생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했다. 음식의 맛을 평가하는 것은 물론 신 메뉴가 나오면 이를 홍보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는 동안 나는 학생들의 식생활 정보를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생각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 선배를 본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루 종일 먹을 것만 생각하고 먹을 것만 이야기하는 내가 한심하고 못나보였다.

인어 공주가 이렇게 육지를 동경하게 된 걸까. 나는 갑자기 ‘영어 토론’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동아리에서 그 선배와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사귀는 상상을 했다. 2학년이 됐으니 이제부터 영어를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마음먹고 영어 토론 동아리 문을 두드렸다. 동방을 지키고 있던 한 여자 선배가 나를 반갑게 맞았다. 쭈뼛쭈뼛 거리는 나에게 선배는 이 동아리에 들어오면 영어는 물론 남친까지 얻게 될 거라며 꼬드기기 시작했다. 대대로 훈남이 많은 것이 이 동아리의 최대 자랑거리란다. 내가 영어 실력에 대해 걱정하자 선배는 다들 같이 공부하면서 느는 것이라며 깔깔깔 웃었다.

그 여자 말고 저를 보세요!

# 3. 용기내다

그렇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맛집 동아리에서 1년간 쌓아온 경험과 인맥 따위는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결심하고 맛집 동방에 가서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깜짝 놀란 동아리 선배가 이유를 물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제 영어 공부를 해야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는 잽싸게 영어 토론 동아리방에 가서 가입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땐 나중에 이걸 얼마나 후회하게 될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왕자를 만나기 위해 눈이 뒤집혀서 고향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마녀의 제안까지 덥석 문 순진한 인어 공주처럼 말이다.

인어공주의 육지 라이프가 만만치 않았던 것처럼, 나의 동아리 환승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먼저, 영어 토론 동아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준 높은 곳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영어로 토론하는데 주제가 정치ㆍ경제ㆍ사회ㆍ철학 등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한국어로 토론해도 쉽지 않은 주제였거니와 미숙한 영어 실력도 문제였다. 나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의 실력은 거의 원어민 수준이었다. 잿밥에 관심을 갖고 들어왔다가는 찍소리도 못하고 집에 가기 십상인 그런 곳이었다. 영어를 못 해도 괜찮다는 마녀같은 선배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는 대부분 토론 시간을 그 선배만 바라보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왕자를 만난답시고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공주와 다름없었다.

왜 말을 못해

# 4. 사라지다

내가 멍 때리며 앉아있는 사이, 그 선배는 한 여자아이와 친해졌다. 원어민처럼 영어를 잘하고 토론도 잘하는 똑똑한 여자 아이였다. 나의 모든 감각이 그 선배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선배와 여자애가 서로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동아리 뒤풀이 자리에서 몇 차례 선배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선배는 여자아이와 꽤 친해진 상태였다. ”선배를 먼저 좋아한 건 나에요!“라고 고백할 수도 없었다. 나는 작고 초라해졌다. 영어 토론은 점점 견디기 힘들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찾은 동아리방, 뭔가 평소와 달랐다. 동아리 사람 누군가가 그 선배와 여자아이가 교내에서 손잡고 걸어가는 것을 봤단다. 멍해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시는 이 동아리에 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슬픈 직감이 들었다. 인어공주는 거래를 통해 각선미라도 얻었지만,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박차고 나온 맛집 동아리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두 개의 동아리를 모두 포기하고, 한동안 정처없이 교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물거품이 돼 사라진 비련의 인어공주처럼 말이다.

저는 퇴장합니다

잉어공주 기자 The Little Mermaid@joongang.co.k*r

※기자 이름과 e메일 주소는 글 내용에 맞춰 허구로 만든 것입니다. 이 칼럼은 익명으로 게재됩니다. 필자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중 한 명입니다. 다양한 문화 콘텐트로 연애를 다루는 칼럼은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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