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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철근의 시시각각

사표 각오한 수사 정권도 못 덮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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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철근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정철근
논설위원

“국회의원들은 칼만 안 들었지 다 강도다.”

 1997년 4월 7일 밤 서초동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조사실.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검사에게 이런 푸념을 늘어놓았다. 정 회장은 이날 국회 한보사건국정조사특위에 참석해 폭탄발언을 했다. ‘정태수 리스트’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갑자기 신한국당 김덕룡 의원, 자유민주연합 김용환 의원, 새정치국민회의 김상현 의원에게 돈을 줬다고 폭로한 것이다. 세 사람 모두 여야의 실세 정치인이었다. 다소 지루하게 진행되던 청문회는 발칵 뒤집혔다.

 정 회장은 이때부터 청문회 분위기를 주도했다. 목소리를 높였다가 의원들로부터 태도가 불량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정태수 리스트’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입을 열면 정치권에 핵폭탄이 터질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다.

 “김기수 검찰총장이 정태수 리스트가 있다고 했습니다. 돈을 준 정치인은 누가 선별했습니까.”(김재천 의원)

 “돈 준 사람이 사법처리 되면 저한테 불리한 문제가 닥쳐올까 싶어서 진술할 수 없습니다.”(정 회장)

 “증인의 말 한마디에 누구는 재수가 나빠 뇌물이 되고 누구는 정치자금이 되고. 사실 증인에게 돈 많이 받아먹고 지금 신문에 이름도 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을 주면 대부분의 정치인은 거절하지 않았지요?”(김 의원)

 “예.”(정 회장)

 TV 중계를 지켜보던 심재륜 대검 중앙수사부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특위가 끝난 뒤 정 회장을 구치소에 보내지 않고 중수부로 불러 밤새 조사를 했다. 이전까지 “간단한 명단 외엔 기억나지 않는다”고 버티던 정 회장은 놀라운 기억력을 보였다. 일시·장소는 물론 정황도 자세하게 진술했다. 모 의원은 돈 상자를 호텔에서 받아 끙끙거리며 직접 옮기다 호텔 직원과 시비가 붙었고, 모 의원은 돈 상자를 받아가다 넘어졌다는 것까지 기억했다.

 이날 이후 정 회장은 다시 입을 닫았다. 나중엔 실어증(失語症)에 걸린 행세까지 했다. 그래도 검찰이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33명의 정치인을 소환조사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 소환 전엔 “정태수를 알지도 못한다”고 부인하던 정치인들도 정 회장의 구체적인 진술을 들이밀자 꼼짝 못하고 시인했다.

 하지만 당시엔 정치자금을 처벌하는 조항이 없었다. 대가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국회의원이 돈을 받았다고 해도 기소할 수 없었다. 결국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 중 8명만 뇌물수수죄로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자금법이 개정됐다. 지금은 불법 정치자금을 받으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돼 있다. 대신 공식적인 선거자금은 국민세금으로 보전해 준다. 이후 정치인들의 정치자금 수수 관행은 많이 투명해진 듯했다.

 데자뷰(Deja-vu). 처음 경험인데도 이미 본 적이 있다고 느끼는 심리현상이다. 18년 전 이맘 때 검찰을 출입했던 나에게 ‘성완종 리스트’는 ‘정태수 리스트’의 데자뷰 같다. 등장인물만 다르지 뭔가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리스트에 거명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인하고 있지만 의혹은 더 커지고 있다. ‘정태수 리스트’ 땐 국가 의전서열 2위인 김수한 국회의장이 포함됐고, ‘성완종 리스트’엔 국정 2인자인 이완구 국무총리가 올라 있다. 다른 점은 정태수 회장의 경우 살아 있었고, 성완종 회장은 죽어서 추가 진술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이 어떻게 이 사건을 처리해야 살 길인지도 보인다.

 정태수 리스트 수사를 지휘했던 심재륜 변호사와 통화를 했다. 심 변호사는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을 ‘제2의 정태수’라고 불렀다. 광범위한 로비 능력이나 비상한 기억력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는 성완종 리스트 수사팀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문무일 수사팀장은 사표를 냈다고 생각하고 수사에 임해야 한다.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하려면 그런 필사적인 수사 의지가 필요하다. 전두환 정권 때도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면 화를 낼지언정 덮으라곤 못했다.”

정철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