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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차라리 모르고 지나쳤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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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경제부문 차장

인도가 따로 없는 2차로 국도 옆. 할머니 한 분이 조용히 서 계셨다. 아스팔트 위에 놓인 과일과 음식들, 하얀 소복 차림에 두 손을 모아 쥔 모습. 기도나 치성을 드리는 게 분명했다.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논두렁으로 돌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랬다. 할머니를 지나쳐 뒤돌아보니 음식 앞에 놓인 영정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청년의 흑백사진. 함께 가던 친구가 말했다. “저 할머니, 해마다 이래. 아들이 교통사고로 여기서 죽었대.”

 초등학교 6학년, 하굣길이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처음으로 봤다. 철없던 나이, 헤아리기 어려웠지만 아픔이 크고 깊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음 앞에서 숙연해야 한다는 것, 산 자에게는 물론 죽은 이에 대한 예의란 게 있다는 것도 처음 느꼈다.

 추모란 이런 것이라고 알고 살아왔다. 크든 작든 슬픔에 공감하고 공동체가 작은 배려를 나누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세월호 1주기에 보고 들은 소식은 이와는 거리가 참 멀다. 박근혜 대통령은 추모식에 참석하지 않았다(혹은 못했다). 진도 팽목항을 방문해 담화를 발표했을 뿐이다. 유족들이 정부와 함께 안산에서 열려던 공식 추모식은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취소됐다. 그런 가운데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선 ‘국민안전 다짐대회’라는 생뚱맞은 행사가 열렸다. 세월호 참사 때문에 생긴 부처가 세월호가 침몰한 날 한 행사다. 소방·경찰 등 안전 관계자 수백 명이 모였는데,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들에게 묵념 한 번 하지 않았다. (이완구 국무총리는 당초 여기에 가려고 했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공감과 배려가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슬로건과 책임 회피, 관료주의의 관성이 진하게 느껴질 뿐이다. 대통령은 담화에서 “이제 세월호의 고통을 딛고 그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길에 나서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했다. 의문이 든다. 과연 세월호의 아픔은 치유됐는가. 그 교훈이 제대로 정리돼 실행되고 있는가.

 치유와 화해를 이끄는 건 진심일 것이다. 남의 일인 양, 지난 일인 양 해서는 상처와 분열을 키울 뿐이다. 하물며 지도자와 공직자가 그래선 안 된다. 영문도 모르고 희생된 이들의 첫 기일에 진심과 반성이 담기지 않은 제사상을 내미는 것도 무례다. 부디 304위의 영령들이 사는 하늘엔 달력이 없기를, 그들이 이날을 모르고 지나쳤기를 바란다. 제대로 된 상을 차릴 수 있는 날까지.

나현철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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