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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푸트 공사와 정동(貞洞)의 공사관거리

중앙일보

입력

피습의 상처에서 회복중인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금년 초 서울에서 태어난 아들 세준이를 위한 한국식 백일잔치를 준비한다고 한다. 132년 전 푸트 공사가 구입하여 정동을 ‘공사관거리’로 만든 대사관저에서 세준이의 백일잔치가 열리게 되었다.
1880년대에 들어와서 일본의 조선 진출이 강화되자 종주국인 청국은 위협을 느끼게 된다. 청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열강과도 수교하도록 조선에 권한다.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은 외교 경험이 없는 조선을 위해 독일인 묄렌도르프(1848-1901)를 외교 고문으로 파견하였다.
1882년 5월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가장 먼저 체결하였다. 이듬 해 1883년 5월 변호사 출신으로 칠레의 항구도시 발파라이소에서 총영사를 역임한 푸트(L.H. Foote 1826-1913)가 초대 미국의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한다. 당시 미국이 대부분 국가에 영사를 파견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조선에 중국이나 일본과 동급의 최고위 외교관을 파견한 것은 파격적이었다.
푸트 공사는 외국인을 위한 숙소가 전혀 없던 서울(漢城)에서 당분간 묄렌도르프 집에 기거하면서 공사관 자리를 물색하였다. 당시 서울 도성 내에는 외교 공관이 없었다. 조선은 외국 공사관으로서는 1880년 서대문(敦義門)밖의 청수장에 처음으로 일본공사관 설치를 인정하였지만 도성 내에는 불허하였다. 그러나 푸트 공사에게는 처음으로 도성 내 공사관 설치를 허가하였다.
푸트 공사는 공사관에 적합한 입지를 갖춘 지역을 찾아보았다. 공사관의 업무는 예나 지금이나 유사시 주재국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신속하게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로는 안전한 곳이란 가장 가까운 항구에 정박 중인 자국의 함대에 승선시키는 것이었다. 푸트 공사는 청국의 예를 참고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국의 수도 베이징의 가장 가까운 항구는 텐진(天津)이고 서울의 경우 제물포(인천)이다. 당시 베이징에서 외국의 공사관들이 몰려 있는 공사관거리(legation street)는 동교민항(東交民巷 뚱자오민샹)이었다. 동교민항은 본래 동강미항(東江米巷)으로 불리던 곳으로 중국 남쪽의 곡물이 운하를 통해 텐진을 경우 베이징 까지 운반된 남량북운(南糧北運)의 터미널이었다.
푸트 공사는 도성 내에서 제물포와 가까운 서대문 근처를 물색하였다. 이는 유사시에 서대문을 빠져 나와 마포에서 배를 타고 베이징-텐진 사이의 운하 같은 한강의 물길을 따라 내려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푸트 공사는 서대문에서 서소문(昭義門)사이의 남북으로 둘러 처진 성벽 안쪽의 배(梨)밭을 끼고 북으로는 동서로 뻗은 꽤 높은 야산의 언덕 남향 골짜기가 마음에 들었다. 인근에는 한 때 왕궁으로 쓰였지만 당시는 사용되지 않은 경운궁이 있는 곳이다.
푸트 공사는 이곳의 전통 한옥과 주변의 땅을 사들였다. 명성황후의 친척인 강원도 관찰사 민치상의 아들 민계호의 사저였다. 여기가 세준이의 백일잔치가 예정된 정동(貞洞) 미국 대사관저의 옛 모습이다.
정동은 본래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神德)왕후의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이다. 이성계는 자신의 부인이자 참모며 비서였던 신덕왕후 강(康)씨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함경도의 무장출신으로 입신한 이성계는 수도 개성(開城)의 정치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신진 사대부 정몽주 정도전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들은 이성계를 이용할 뿐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이 때 이성계가 강씨를 만났다. 대대로 개성에서 벼슬을 한 양가집 규수인 강씨는 야심이 있는 여자였다. 이성계를 망해가는 고려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인물로 보았다. 21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둘은 결혼한다. 첫 부인 한(韓)씨가 고향을 지키는 향처(鄕妻)라면, 강씨는 이성계의 서울(開城)에서의 정치활동을 도우는 경처(京妻)였다.
강씨는 이성계를 통해 조선왕조의 건국에 성공함으로써 자신은 조선왕조의 첫 왕비가 되고 아들(방석)은 왕세자가 되었다. 강씨는 자신의 꿈은 이루었으나 한참 나이인 40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조선왕조 초기의 대혼란의 시발점이 된 ‘왕자의 난’은 강씨가 죽은 후에 일어 난 일이다.
태조 이성계는 강씨에 대한 그리움으로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정릉(貞陵)을 조성했다. 지금 영국 대사관이 소재하는 정동 4번지이다. 그리고 인근에 흥천사를 지어 강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왕자의 난을 성공시킨 태종 이방원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킨 후 정릉을 파괴하고 이전하는 일이었다. 지금의 성북동 정릉이 새로 옮긴 정릉이다.
푸트 공사가 정동에 공사관을 개설하면서 서양 열강이 이어서 이곳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외국의 교회와 학교가 들어섰다. 정동이 조계지처럼 외국인 거리가 되고 손탁 호텔 등 외국인 전용 호텔도 신축되었다. 미국정부는 다른 나라와 달리 푸트 공사가 구입한 공사관의 한옥을 유지하고 서양식으로 새로운 건물을 짓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 조선 왕조시대 정동의 본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미국 대사관저와 주변의 수림이라고 한다.
공사관 초기에 푸트 공사와 함께 근무한 사람은 의사인 알렌과 포크 무관이다. 두 사람 모두 당대 정권의 최고 실세 민영익(閔泳翊 1860-1914)과의 특별한 관계가 관심을 끈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일족으로 민씨 외척정권의 중심인물이었다.
미국과 수교한 조선은 미국 정부가 서울에 푸트 공사를 파견 신임장을 제정하자 2개월 후인 1883년 7월, 약관 23세의 민영익을 전권대신(正使)으로 하는 보빙사(報聘使 답례사절)를 미국에 파견하였다. 미국 대통령 아서(C.A. Arthur)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해서였다. 민영익 일행은 한국어(조선어)-중국어-영어, 한국어-일본어-영어 등 이중 통역을 위해 중국인 우리탕(吳禮堂)과 일본인 미야오카(宮岡)도 수행시켰으나 한국어와 영어를 바로 통역하는 사람이 없고 수행원들이 서양 예절을 몰라 불편하였다.
워싱턴에 도착하자 미 국무성은 한국어를 할 수 있는 미국인을 급히 찾았다. 그 때 해군성에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포크(G.C. Foulk 1856-1893)소위가 중국어 일본어와 함께 한국어를 잘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무성은 포크 소위를 통역 겸 안내인으로 임명하였다.
포크 소위는 민영익 일행에게 언어뿐만이 아니고 미국 및 서양의 문화며 예절 등도 소상하게 알려주어 민영익의 호감을 얻었다. 민영익은 다음 행선지 유럽에서도 포크의 통역과 안내가 필요해 하자 미 국무성은 포크를 보빙사 일행을 계속 수행토록 하고 수행이 끝난 후에는 조선 주재 무관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발령을 냈다. 보빙사 일행은 포크 무관과 함께 유럽과 이집트 인도 홍콩 나가사키 등을 거친 뒤 1884년 5월 귀국한다.
알렌(H.N. Allen 1858-1932) 박사는 민영익의 생명의 은인으로 유명하다. 보빙사가 귀국한 그 해 12월 조선정부 내에 정변이 일어난다. 갑신정변이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가 우정국 신청사 낙성을 축하하는 외교 행사장에서 수구파인 민(閔)씨 일족을 암살한 사건이다. 행사장에는 푸트 공사와 묄렌도르프도 참석하였다.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맞아 쓰러지자 묄렌도르프가 인근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푸트 공사와 협의 알렌 박사를 급히 불렀다. 알렌 박사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3개월 전에 서울에 온 미국 공사관 소속의 무급의사였다.
민영익은 알렌 박사의 수술 등 외과치료로 생명을 구하고 3개월 후에 회복하였다. 외과치료가 알려져 있지 않은 조선으로서는 기적이 일어 난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알렌 박사에게 서양식 병원 광혜원(제중원)설립을 지원하고 개신교에 대해 자유로운 선교의 길을 터 주었다.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 등 선교사들이 대거 조선으로 올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 초기 선교사들이 미국 공사관 인근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지금 대사관저가 있는 정동이 선교사의 거리로도 불리어 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미국에 이어 영국(1883) 러시아(1884) 등이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푸트 공사의 선례를 따라 정동에 공사관을 개설한다. 영국이 경운궁 뒤 쪽 과거 정릉이 있던 위치에, 그리고 러시아는 미국 공사관 인접 야산 언덕위에 개설하여 10년 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고종의 임시거처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 초기 신덕왕후의 비극이 서린 정동이 조선왕조 말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푸트 공사가 이곳을 공사관 자리로 잡았기 때문이다. 푸트 공사의 선택이 정동을 공사관 및 선교사 거리로 만들었다. 고종이 아관파천 1년 후 1897년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정동의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하여 10년간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삼은 것도 정동이 공사관 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정동의 공사관 거리도 열강의 권력투쟁과 세력전이로 오래 가지 못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최근 한국 정부가 중국에 경사되었다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 리퍼트 대사는 “미국은 한중(韓中)이 좋은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한미, 한중 관계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동북아 이슈 등 주요사항에 대해 한미(韓美) 양국 정부는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자신이 피습 이후 한국인들의 성원이 한미관계의 지표로 본다는 리퍼트 대사의 빠른 회복을 기원하고 그의 아들 ‘제임스 윌리암 세준 리퍼트’의 백일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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