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맨손으로 2조원 기업 일궈 … “오직 먹고살려고 앞으로 나갔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22호 04면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숨지기 하루 전인 지난 8일 오후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중앙포토]

“나는 극한상황에서 출발한 사람이다. 너무 가난해 오직 먹고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뒤로 처박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던 그 시절, 나로서는 꿈이나 성공이란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호사스러운 일이었다.”(성완종 자서전 『새벽빛』 282페이지)

리스트 폭로한 성완종은

 지난 9일 숨진 성완종(64) 전 경남기업 회장은 맨손으로 시작해 2조원대 기업의 회장이 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그가 자서전에서 밝혔듯이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불우했다. 충남 서산에서 유년기를 보낸 성 전 회장은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서울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어머니를 찾아 상경했다. 1976년 그는 화물차 영업으로 모은 140만원을 들고 건설업(서산토건)에 뛰어들었다. 이후 82년 32세의 나이로 대아건설 사장에 취임했고, 2004년에는 도급 순위 20위권인 경남기업을 인수하며 사세를 키웠다.

 시련도 있었다. 대아건설 사장 시절 그는 정치인에게 뇌물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돈을 가지고 있는 한 언제 누구에게 모함을 당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런 우려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온 사람은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는 상상만으로도 가슴부터 답답한 법이다. 나는 하나 가지고 있던 통장마저 없앴다.”

 성 전 회장이 해외자원개발사업에 눈을 돌린 건 2005년부터다. 당시 한국석유공사가 국내 기업들과 컨소시엄을 꾸려 추진했던 러시아 캄차카반도 석유탐사사업에 경남산업이 20%의 지분을 투자해 참여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외자원개발사업에 뛰어들어 마다가스카르 광산 개발, 미국 멕시코만 심해 가스탐사사업 등에 잇따라 참여했다.

 기업인으로 승승장구했던 성 전 회장은 2000년 ‘충청포럼’을 설립하면서 충청권 인사들을 중심으로 폭넓은 인맥을 쌓았다. 그는 이런 든든한 정치적 자산을 토대로 정치권 진입을 노렸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2000년 16대 총선 때 자유민주연합(자민련) 공천에서 탈락했고, 17대 총선 때는 자민련 전국구 2번으로 공천을 받았지만 저조한 득표율로 인해 국회 진입에 실패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야 선진통일당(옛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에 출마해 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성 전 회장은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2년 만인 지난해 의원직을 잃었다.

 성 전 회장은 여의도를 떠난 이후 경남기업으로 돌아가 경영에 힘을 쏟았지만 또다시 실패를 경험했다. 그룹 재정이 악화되면서 워크아웃(재무구조 개선)으로 내몰리게 됐다. 경남기업은 지난달 27일 서울중앙지법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성 전 회장과 가까운 한 인사는 “베트남 하노이 랜드마크 사업 등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금이 전부 묶이면서 경영 압박이 엄청나게 심했다”며 “이것만으로도 많이 힘들어했는데, 검찰의 수사망까지 조여 오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