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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 어려운 국가혁신 … 특수재난실장 넉 달 넘게 공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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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호 06면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이 다시 태어나는 계기로 반드시 만들겠습니다.”

대통령 눈물 담화 뒤 나온 10대 조치는 …

지난해 5월 19일, 청와대에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던 박근혜 대통령은 끝내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비정상의 정상화, 공직사회 개혁과 부패 척결을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1년. 박 대통령이 세월호 담화에서 약속한 안전 대책과 국가혁신 조치는 실제로 얼마나 이행됐을까. 중앙SUNDAY는 박 대통령이 제안했던 주요 10개 후속 조치의 진행 상황을 점검해봤다.

#정부서울청사 514호. 지난해 11월에 출범한 국민안전처 특수재난실장 사무실이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안내표에는 ‘공석’이라는 쪽지만 붙어 있었다. 한 공무원이 다가와 “아직 신임 실장이 오지 않아서 다섯 달째 빈 사무실로 두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담화에서 밝힌 국가 개조 구상의 핵심은 정부조직 개편이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에 대해 “해양경찰청의 구조업무가 사실상 실패한 것”이라며 ‘해경 해체’라는 극약처방을 내놨다. 국가기관을 문책한 사상 초유의 조치였다. 대신 국가 재난 시스템을 총괄하는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해 11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국무총리실 산하에 해경과 소방방재청, 안전행정부 안전본부를 통합한 국민안전처가 출범했다. 인사 시스템의 개혁을 목표로 함께 출범한 인사혁신처도 박 대통령이 세월호 담화에서 약속한 신설 기관이다.

안전처 출범했지만 조직 구성 미비
하지만 국민안전처의 경우 민간 전문가 영입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아직까지 조직 구성조차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다. 항공과 에너지· 화학·가스·통신·인프라 등 분야별 특수재난에 대응하기 위해 신설된 특수재난실이 대표적 사례다. 지난해 12월 외국인 전문가를 영입하겠다며 실장 공모에 들어갔지만 아직까지 적임자를 찾지 못했다. 조정원 국민안전처 인사계장은 “외국인 전문가를 우선 영입하려다 원자력 시설 등 보안상 문제가 제기되는 바람에 국내 전문가 쪽으로 적임자를 계속 찾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개방형 직위도 마찬가지다. 국민안전처가 새정치민주연합 박남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안전처 산하 과장급 이상 15개 개방형 직위 중 6곳은 여전히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다. 임용 절차를 마친 9개 직위 중에서도 민간 출신은 3명에 불과해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겠다던 애초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방재전문가인 조원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조직이 꾸려지는 과정에서 전문성이 없는 행정직 인사가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며 “전문성을 키워야 할 국민안전처가 행정관료들의 승진 파티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7월 1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회의실. 세월호 참사처럼 대규모 인명피해 사고를 저지른 이에게 최대 징역 100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다중인명피해범죄의 경합범 가중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안’을 놓고 의원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서기호(정의당) 위원=“이 법안은 사실상 기본법을 완전히 뒤흔드는 내용이라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데요.”

▶홍일표(새누리당) 소위원장=“(법안의) 취지는 이해는 돼요. 왜냐하면 삼풍백화점 사고 때 아무리 법정형을 높이려고 해도 안 됐잖아요. 그런 게 사실 국민 정서에, 법 감정에 안 맞는 거예요.”

▶전해철(새정치민주연합) 위원=“조금 더 논의하고 공청회 하는 게 나을 수 있어서….”

▶홍 위원장=“우리가 공부 좀 하고, 그렇게 한번 하시자고요.”

이 법안은 박 대통령이 담화에서 “선진국 중에서는 대규모 인명피해를 야기하는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는 수백 년의 형을 선고하는 국가들이 있다”며 “앞으로는 대형참사 책임자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지 않도록 만들겠다”고 약속한 지 한 달여 만에 국회에 제출됐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지난해 7월 이후 단 한 차례도 회의 안건에 오르지 못했다. 공청회도 결국 열리지 않았다. 국회 법사위 관계자는 “당시 세월호 후속 법안 중 하나로 논의 테이블에 오르긴 했지만, 이후에 여야 위원들 모두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흐지부지됐다”고 설명했다. 이대로라면 내년 19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해당 법안도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법사위 여당 간사인 새누리당 홍일표 의원은 “다중 인명피해의 기준을 몇 명으로 할지 등 법안 내용을 둘러싼 여러 가지 논란을 해소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언제 다시 법안 심사를 재개할지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병언 처벌 못하는 ‘유병언법’
범죄자 본인의 재산뿐 아니라 가족이나 제3자 앞으로 숨겨놓은 재산까지 찾아내 환수하는 ‘유병언법(범죄수익 은닉 규제 및 처벌법)’은 지난해 11월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법안은 통과됐지만 곧바로 실효성 논란에 휩싸였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인 유병언씨를 겨냥한 법이었지만 유씨가 돌연 사망해버리자 숨진 유씨의 차명 은닉 재산에 대해선 법 조항을 적용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법안 심의 과정에서도 제3자의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할 수 있다며 위헌 문제까지 제기됐지만 여야는 결국 법을 통과시켰다. 이상민 법사위원장은 “모두가 실효성이 없는 걸 알면서도 대통령도, 법무장관도 통과시켜 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해서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국민을 향해 눈속임하고 사기 친 것”이라고 인정했다.

‘관피아(관료+마피아)’ 방지 대책의 하나로 내놓은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안)’은 외형상으로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내년 9월부터 시행될 예정이지만, 김영란법의 한 축을 차지한 이해충돌 조항은 국회 심사 과정에서 “추후에 논의하자”며 제외됐다. 친·인척이 관련된 업무에서 공직자를 배제하는 내용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조차 “이해충돌 조항은 반부패 정책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며 “가장 비중이 큰 이해충돌 조항이 빠진 것은 ‘반쪽 법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를 위한 ‘4·16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은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여야 합의로 특별법이 처리되긴 했지만, 시행령을 둘러싼 정부와 유가족 간 갈등으로 인해 아직 본격적인 진상조사에 한 발자국도 들어서질 못한 상태다. 현재로선 참사 1주기인 16일까지도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권영빈 특조위 진상규명소위원장은 “시행령이 통과되지 않으면 조사할 수 있는 인력 자체가 없다 보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정부가 진상을 규명할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유가족 배·보상 문제도 발이 묶였다. ‘4·16 세월호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이 지난 1월 국회를 통과하면서 정부는 배·보상 절차를 진행하려 했지만, 유가족 측이 “선체 인양과 철저한 진상 규명이 우선”이라며 전면 중단을 요구한 상태다.

“한국 안전해졌는지 여전히 의문”
세월호 후속 대책 중 법 개정을 통해 진전을 이룬 조치도 있다. 관피아 척결을 위해 퇴직 공직자의 취업제한 조치를 대폭 강화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박 대통령이 담화에서 언급한 이 법안은 국회를 거쳐 지난달 31일부터 시행됐다. 이에 따라 퇴직 공무원의 취업제한 기간은 기존의 퇴직 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됐다. 취업심사도 한층 까다로워졌다. 2급 이상의 고위 공직자의 경우 소속 기관의 업무를 기준으로 업무 관련성을 판단받아야 한다.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개정안’도 올해 1월부터 시행됐다. 당초 유병언씨가 회생 절차를 악용해 2000억원 상당의 채무를 탕감받고 사실상 경영권을 회복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법 개정이 추진됐다. 개정안에 따라, 회생 절차가 진행 중인 회사를 인수하려는 자가 회생 절차 개시에 중대한 책임이 있는 이사와 특수관계에 있는 경우 법원은 회생계획을 인가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정부는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고 국민안전의식을 높이기 위해 재난관리법 개정을 통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4월 16일을 ‘국민안전의 날’로 지정했다.

충북대 이재은(행정학) 교수는 “대국민담화 이후 중앙부처 개편 등 일부 후속 조치가 이뤄지긴 했지만, 한국이 1년 전보다 더 안전한 사회가 됐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라며 “대통령이 내놓은 안전 대책과 국가혁신 조치들이 현장에서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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