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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 돈거래 기록 꼼꼼…제 3 인물이 추가 폭로할 수도"

중앙일보

입력

성완종 리스트’가 정치권을 강타한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를 방문한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부
장관을 기다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중앙포토]

숨 죽인 여권, 어정쩡한 야권.

현 정권 실세 8명의 실명과 돈이 적힌 '성완종 리스트'가 드러나면서 신춘 정국의 시계가 완전 정지됐다. 대형 정치 게이트로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 속에 보름 남짓 다가온 4·29 재보선의 향배는 안개 속에 휩싸였고, 공무원연금개혁·세월호 인양 등 굵직한 정국 현안의 논의도 실종됐다. 당사자들의 부인과 반발은 11일에도 이어졌다. 2012년 대선 당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2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홍문종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1원이라도 받았다면 정계 은퇴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불통이 어디로 튈지 가늠키 어려운 가운데 여권은 바짝 고개를 숙였다. "차떼기 정당의 악몽이 되살아날까 두렵다"(새누리당 하태경 의원)라는 본능적인 방어가 이어졌다. 흥미로운 건 새정치민주연합이다. 오랜만에 정국 주도권을 찾을 호재임에도 의외로 차분했다.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신중 모드였다.

"야당도 뒤가 켕길 것"

새정치연합 지도부는 10일 오후 긴급 회의를 열고 이번 사안을 '친박 권력형 비리게이트'로 명명했다. 권력 실세들이 집단적으로 뇌물을 수수한 건 헌정사상 처음이라는 설명이었다. 전병헌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한 대책위원회도 꾸렸다. 13일부터 시작되는 대정부질문에서 이번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로 했다. 11일에도 김성수 대변인은 "돈을 받았다는 유정복·홍문종·서병수 등은 2012년 박근혜 후보 캠프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대통령이 나서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집권층의 사소한 비리에도 거칠게 몰아붙이던 과거 야권의 공세와 비교하면 예상 외로 점잖은 톤이다. 이에 대해 새정치연합 관계자는 "솔직히 우리도 멘붕(멘탈붕괴)"이라고 토로했다. "최측근 권력비리라고 해도 과거엔 김현철(김영삼 정부), 김홍업(김대중 정부), 이상득·박영준(이명박 정부) 등 한두 명 아니었나. 근데 이번엔 박근혜 정권의 1,2,3대 청와대 비서실장 등 실세가 몽땅 얽혀 있다. 전선이 너무 넓고 세다. 누구를 정조준 해야 할 지 난감하다"고 전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특검 실시" 주장도 아직 나오질 않는다. 오영식 최고위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특검은 아직 시기 상조다. 검찰의 대응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4·29 재보선에서 4전 전패 위기에 몰렸던 새정치연합으로선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셈이다. 하지만 진성준 전략기획위원장은 "선거의 전략적 기조는 흔들리지 않는다. 정권심판론이 아닌, 경제정당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할 계획"이라고 선을 그었다. 자칫 "남의 약점을 이용해 선거에 재미 보려고 한다"는 반감을 최소화시키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새정치연합 관계자는 "이쪽도 뒤가 켕기기 때문"이라고 속내를 전했다. 그는 "성 전 회장이 노무현 정부에서 두 번이나 사면 받지 않았나. 그때 청와대 정무수석과 비서실장이 현 문재인 대표다. 성 전 회장의 마당발 캐릭터로 볼 때 야권에도, 특히 충청권 인사를 중심으로 공을 들였을 것이 분명하다. 섣불리 공격했다가 유탄이 이쪽으로 날라올지 모르니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친박계 겨냥한 죽음의 폭로

급작스런 죽음이 잇따른 폭로로 이어지면서 여의도 정가엔 "죽은 성완종이 산 친박계를 덮쳤다"는 얘기가 퍼져 있다. 성 전 회장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 10일 중앙SUNDAY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성 회장은 결국 죽음으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풀이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20여년간 성 전 회장과 친분을 쌓아왔다는 그는 "기자회견 전날에도 나와 상의했다. '검찰이 작정을 하고 나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한다'고 억울해 했다. 그래서 '(너무 반발하면)미운 털이 박히지 않겠나. 그게 상관 없다면 당신의 생존 방식대로 밀고 나가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기자회견까지 연 거다. 하지만 목숨까지 걸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말했다.

성 전 회장은 익히 알려진 대로 초등학교 중퇴학력의 입지전적 인물이다. 측근 인사는 "아무리 가난하고 못 배워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철학이 확고하다. 그런데 검찰 수사로 모든 게 무너지니 자살과 메모로 '성완종식 정의감'을 표출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또한 "성 전 회장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만나서 담판을 짓는 스타일이다. 삶의 의지가 누구보다 강하다. 벼랑 끝에 몰려도 그 옆의 돌멩이 위에 올라가 또 버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죽음을 스스로 택했다는 건 그만큼 분노가 극에 차 있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평소 돈 거래만큼은 꼼꼼히 기록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수행비서·보좌진과는 단지 상하 관계가 아니라 동지적 끈끈함이 있다. 제3의 인물에 의한 추가 폭로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김무성 대표 위상 강화 여부 주목

'성완종 리스트'는 실제 거론된 정치인들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격탄이 되고 있다. 김형준 명지대(정치학) 교수는 "정권 출범 이후 국정원 개입·세월호·정윤회 문건 등이 잇따랐지만, 금전 문제만큼은 박 대통령이 자유롭지 않았나”고 반문하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지만 그 성역이 깨질 수도 있다는 게 가장 아픈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임동욱 한국교통대(행정학) 교수는 "차라리 시시비비가 가려지면 봉합될 수 있다. 하지만 폭로자가 죽지 않았나.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 정권 내내 정치적 부담으로 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더라도 특검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공방뿐만 아니라 차기 대선 이후까지 정치적 의혹으로 계속 불거질 소지가 다분하다는 지적이다.

워낙 폭발성이 큰 사안이다 보니 새누리당 내부에선 불협화음이 당장 불거지진 않고 있다. 새누리당 김영우 대변인은 "지도부도 입장 정리가 안됐다. 소장파들은 당장 재·보선이 아니라, 내년 총선은 물론 후년 대선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난감하고 심각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친이계 정병국 의원은 "기획수사의 부메랑이 이렇게 빨리 돌아와 당혹스럽다"고 말했고, 권성동 의원 역시 "사회적 살인"이라고 사건을 규정지으며 검찰을 비난하는 분위기다.

모처럼 40%대까지 회복했던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본격적인 레임덕이 시작될 것이라는 이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이처럼 냉랭해진 정국을 헤쳐나가기 위해 여권 내부에선 그간 소외됐던 이른바 '멀박'(멀어진 친박)에 다시 힘이 실릴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진단이 우세해지고 있다. 김형준 교수는 "현 박근혜 정부의 두 핵심인 이완구 총리와 이병기 비서실장의 이름이 거론됐지만, 돈 액수는 나오지 않았다. 역으로 면죄부를 받은 셈"이라며 "그래도 당·청 관계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당이 전면에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선 "성완종 리스트의 최대 피해자가 박근혜 대통령이라면, 수혜자는 김무성 대표"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임동욱 교수는 "위기 때마다 정면돌파를 하곤 했던 박 대통령이 이번에도 선제적인 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며 “이후 정국이 어떻게 전개될 지가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민우·이충형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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