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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연재소설] 판게아 - 롱고롱고의 노래 <5> 탐험가 누이와 폴리페서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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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임수연

푸르른 새벽이었다. 폭풍우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윙윙 탁탁 윙윙 탁탁, 바람소리와 빗소리, 노크 소리는 이렇게 서로를 왜곡하지 않으며 함께 회오리쳤다. 누이는 노크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누이의 간절한 기다림만 있었다. 빽빽한 빗줄기 속으로 탁탁탁 물찬 바닥을 뛰는 단단한 소리가 강렬했다. 누이는 도망하는 ‘빨간 외로운 외투’를 쫓았다. 얼마나 쫓았을까? 푸르른 새벽은 급작스럽게 쨍쨍한 아침으로 돌변해 있었다.

누이는 눈이 부셔 눈을 찡그렸다가 다시 부릅 떴다. 강인가? 바다인가? 그곳에서 찬란한 반짝임이 달려와 누이의 눈동자에 알알이 박혔다. 누이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비늘이 묻어났다. 다이아몬드였다. 문득 강인지 바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이 누이 앞에 바짝 섰다. 누이는 자꾸 높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강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그 세상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세상은 물컹한 대륙이었다. 4월 5일 04시 45분이었다.

물의 대륙으로 들어간 탐험가 누이

“누구야?”

마루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수리는 흥분 상태였다.

“4월 5일 04시 45분…. 누이 맞아.”

“그걸 외웠어? 학교 내신 시험, 대학입학 수능 시험에도 안 나온단다 친구야. 그런데 뭐하러 외우는 거니? 그렇게 심심하냐?”

마루는 볼멘 소리를 했다.

“나는 시험 해방교 교주. 시험에 안 나오는 것만 외울뿐이지.”

정신없이 옮겨다니던 이상한 기호들이 멈추었다. 수리는 눈앞에 멈춰선 채 펄럭이는 깃발의 종이를 나꿔챘다. 그때 온 얼굴에 화장이 수묵화처럼 번진 기이한 몰골로 나타난 골리 선생님이 훌쩍거리며 울먹였다.

“베로샘이 없어. 아무리 찾아도 없어.”

수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유레카!”

수리는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된 종이를 힘차게 흔들었다.

“너희들이 여자의 순정을 알아?”

골리 선생님은 구석진 곳으로 푹 찌그러졌다. 그녀의 얼굴은 허연 찐빵 색상이었다.

“오, 빈티지 신문?”

마루도 신기한지 만져보려 했다. 그러나 수리가 마루를 발로 뻥 찼다.

“이렇게 오래된 종이는 네가 만지면 썩어.”

“뭐야?”

마루는 분해서 씩씩거렸다. 사비는 눈치 빠르게 얼굴만 신문 속으로 쏘옥 들이밀었다. ‘물의 대륙으로 걸어들어간 미친 탐험가, 누이’라는 헤드라인이 크게 찍혀 있었고, ‘빨간 외로운 외투’를 입은 누이의 눈빛은 자칫 닿기라도 하면 칼처럼 베일 듯 서늘했다.

“누이? 그 누이? 진짜 누이?”

사비도 놀라고 있었다. 마루는 바닥을 뒹굴며 포복절도했다.

“누이라, 누이. 누나. 먹을걸 가져올 누나. 하하.”

사비가 마루의 이마에 딱밤을 쏘았다. 마루의 이마는 순식간에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사비, 네 손 독극물에 담궜다 왔어? 나 곧 죽는 거아냐?”

사비가 다시 딱밤을 쏠 자세를 취하자 마루가 재빠르게 수리 뒤에 가서 숨어버렸다. 수리는 귀찮은 마루를 떨치더니 웅변하듯 소리쳤다.

“셧업! 누이라면 억만장자야. 그런데 어느 날 실종되었지. 그의 가족들이 그를 찾느라 천문학적인 경비를 썼는데 결국 못 찾았잖아?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마루는 수리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서 뭐해? 무사히 살아남았어도 이젠 죽었어. 이미 해골이라고. 해골.”

마루의 이마는 점점 더 부풀어올랐다. 순간 핑핑 돌며 종횡무진하던 이상한 기호들이 다시 멈추었다. 수리가 멈춘 종이를 잡아챈 뒤 순식간에 아래 위로 훑었다.

“폴리페서?”

“사람 이름이야?”

사비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폴리페서를 만나라고 해.”

“오, 이건 수수께끼야. 난 이런 거 좋아해.”

마루는 퉁퉁 부어서 뒤틀린 오크 얼굴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수리는 사비와 마루를 번갈아 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확하게 내 이름, 수리를 지칭했어. 수리에게 전한다고 했고….”

수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비와 마루는 침도 못 삼키고 수리만 보았다.

“이 신호를 보낸 시점이 거의… 거의….”

“거의 뭐? 말해봐.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마루는 이제 수리의 멱살까지 잡고 있었다.

“거의 1억 년….”

“뭐어? 뻐~엉은. 수리야, 축하한다. 너도 드디어 정치인의 세계로 들어섰구나.”

마루는 아직도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름 돋는다. 이미 그렇게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거야?”

사비의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번들거렸다.

“근데 폴리페서를 만나서? 그 다음은?”

사비는 집요했다. 참다못한 마루가 폭발했다.

“폴리페서든 아니든 우리가 누이를 찾아서 뭐하게? 너희들 도대체 왜 그러는데?”

마루는 자꾸 어깃장을 놨다.

“누이는 거인들의 사라진 노래를 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래서?”

“누이를 찾으면 귀가 긴 족속을 찾을 것이고…”

“그래서?”

“귀가 긴 족속을 찾으면 거인들을 찾을 것이고…”

“그래서?”

마루는 수리의 입을 자신의 손으로 틀어막아 버렸다.

“거인들을 찾으면…”

수리가 입이 막힌 채로 웅웅거렸다.

“우리 모두의 아빠를 찾을 수 있어.”

사비는 간절히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아빠를 찾아주세요.”

마루도 계면쩍은 표정으로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아, 그렇구나. 아빠를 찾으면 아빠는 맛있는 음식을 주실 거야. 먹을 걸 생각하니까 전두엽이 맑아진다.”

그동안 실연의 고통을 인내하는 척 과도한 화장에 몰두하던 골리 선생님이 끼어들었다.

“폴리페서? 느낌이 확 오네. 남자 사람?”

“기나긴 얼굴 개조작업 끝났어요?”

골리 선생님은 손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요리조리 비추고 있었다.

“잘 몰라요, 여자 사람일 수도 있어요.”

수리는 최대한 퉁명스럽게 쏘아댔다. 골리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돈도 많고 시간도 많고 인맥도 넓고 정치적 권력도 갖고 있는 남자 사람이면 좋으련만….”

“샘, 베로샘은요? 벌써 고무신 거꾸로예요?”

수리가 눈을 부라렸다.

“너 베로샘 친척이야? 수리야,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니? 베로샘은 군대 면제야. 넘쳐나는 잉여 방위도 아니야. 사실상 남자도 아닐지 몰라. 음…뭐랄까, 유사남자?”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수리는 골리 선생님을 상대하기 싫었다.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남자가 진짜 남자지.”

마루도 나섰다.

“폴리페서가 남자 사람인지 여자 사람인지 아직 모르고요, 샘이 말하는 그 정도의 현실적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도 아직 몰라요.”

“분명히 그런 남자 사람일 거야. 난 겨우 정규직에 복귀했다가 너희들 따라와서 이 꼴로 망했어. 남자 사람이라도 잘 만나야 한다고.”

골리샘의 말에 수리는 화들짝 놀랐다.

“샘, 저희 따라가시게요?”

골리 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사비와 마루도 얼굴이 일그러졌다.

“샘, 제가 추천할게요. 샘은 여성부에 취직하시면 딱이에요. 게임 규제 뭐 이런 거 하시면 딱이라고요.”

사비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노노. 난 고고학도 여성부도 안 맞아. 난 남자 사람을 만나서 잘 먹고 잘 사는게 맞아. 그러니까 난 꼭 따라가야겠어.”

수리가 오른손을 들고 선서했다.

“난 포기.”

“나도.”

“나도.”

사비와 마루도 각자 오른손을 들고 선서 흉내를 냈다.

수리·사비·마루의 모험에 합류한 골리샘

어디선가 안개가 그웨난곤 뱀처럼 길게 기어나오고 있었다. 집 안에서는 노크 소리도 들렸다. 수리와 사비, 마루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골리 선생님은 얼어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노크 소리는 매우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윙윙 탁탁 윙윙 탁탁. 수리가 먼저 한 발씩 다가갔다.

“캄브리아기, 오르도비스기, 실루리아기, 데본기, 석탄기, 페름기…”

수리가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 그러더니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수리야 뭐 하는 거야?”

사비가 괜히 속삭이듯 물었다.

“조용. 암호를 찾고 있어. 집 안에서 노크 소리를 보내고 있잖아. 바로 노란 집이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이야. 스타게이트! 발바라, 우르, 케놀랜드, 콜롬비아, 로디니아, 파노티아, 판게아….”

수리는 또다시 고개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1967년 6월 5일…”

“4월 5일 45분…”

윙윙 탁탁 윙윙 탁탁. 수리는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미토콘드리아 이브(Mitochondria Eve) 의 8000세대 후손이고, 6만 년 전 먹을 거리를 찾아 아프리카를 탈출한 호모 사피엔스의 2400세대 후손이고, 2만5000년 전 시베리아에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의 1000세대 후손이 바로 나다! 나라고!”

“도대체 무슨 소리야?”

마루는 사비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랑스러운 인류라고. 자, 마지막 암호다.”

미토콘드리아 이브(Mitochondria Eve)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하여 추정한 인류의 모계 조상


하지윤은 시인·소설가. 판게아 시리즈 1권 『시발바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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