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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동화로 배웠네<13>『회색 아이』웃겨서 연애하는 여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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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사라진 회색 아이

어딘가에 나 같은 사람이 한 명은 있을 거다. 그 믿음을 가지고 이 글을 시작한다.

나는 회색이다. 가장 길었던 연애는 대학 2학년에 시작했다. 졸업하고도 우리는 만났다. 많은 감정을 느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명명될 때의 미묘한 감정, 처음 손 잡고 키스할 때의 어색함, 누군가 옆에 있어서 채워졌던 마음….

그런데 사랑이었을까? 글쎄다. 그 남자가 들으면 기절할 얘기지만, 나는 처음에 그가 웃겨서 좋았다. 하는 말마다 웃겼다. 그를 옆에 두고 계속 웃고 싶었다. 그 다음에는 같이 밥 먹을 사람이어서 좋았던 것 같다. 또 공강 시간에 멍하니 있지 않아도 돼서, 그 맛에 연애를 했던 것 같다. 스킨십도 좋았지만, 다른 남자였어도 좋지 않았을까?(이 부분에서는 기절 정도가 아니라 병원에 실려갈 것 같다)

뭐가 사랑이라는 건가요

함께 있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불 타는 사랑? 궁금해서 묻는다. 다른 이들은 모두 그렇게 사랑하는 건가? 이게 궁금할 정도로 나는 회색이다.

혹시 나는 정신병리학의 연구대상은 아닐까. 프로이트든 라캉이든 여튼 누군가를 주치의 삼아야 하는 것 아닐까. 개인이 파편화된 현대사회의 상징적 존재는 아닐까. 그러나 나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고, 연애 외의 다른 감정들은 잘 느끼는 편이다. 친구 관계에서 특별한 문제가 생겼던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런데 왜 남자에 폭 빠져 허우적거려 본 적이 없는 걸까.

내 마음도 분홍색이 될 수 있을까

이렇게 주장해보고 싶기도 하다. 사랑이란 감정은 절대적인가? ‘남자친구=심하게 친한 친구’인 게 그렇게 이상한가? 짜릿함이라는 걸 못 느끼는 감정에는 정말로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내게는 역시 항변보다 구걸(?)이 어울린다. 혹시 정말 한 사람도 없을까? 이 글을 읽으며 뜨끔하시는 분. 그런 분이 있다면 댓글을 좀 남겨주길 바란다. 아, 그 전에 동화 『회색 아이』를 읽고 어떤 기분인지도 좀 알려주시면 좋겠다. 동화의 주인공 마르틴은 머리부터 발 끝까지 회색으로 태어났다. 도무지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남극에서 커다란 흰 고래를 보고도,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을 직접 보고도 “저게 뭐 신기하냐”고 묻는 어린아이다.

운명의 상대를 아직 못 만났단 말은 사절입니다

연애 이야기도 아닌데, 이 동화는 왜 이렇게 절절할까. 동화는 마르틴이 결국 웃음과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기르던 햄스터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왔다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결론을 보면서 ‘너만 정상으로 돌아가면 어떡해!’라는 야속한 심정마저 들었던 걸까.

마지막으로 부탁하는데, 혹시라도 아직 회색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고민을 나눠주길 바란다. 회색에도 여러 빛깔이 있겠지만, 그래도 혼자 회색인 것보다는 나으니까!!

무감정 기자 stillneedaman@joongang.co.k*r

※기자 이름과 e메일 주소는 글 내용에 맞춰 허구로 만든 것입니다. 이 칼럼은 익명으로 게재됩니다. 필자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중 한 명입니다. 다양한 문화 콘텐트로 연애를 다루는 칼럼은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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