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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은의 편지

"하늘을 담을 그릇은 하늘밖에 없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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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일러스트=박용석]
고 은
시인

난석(蘭夕)에게

 난석! 하늘을 담을 그릇은 하늘밖에 없소.

 아침에 동녘 하늘을 보고 저녁에 서녘 하늘을 보는 하루하루로 나도 살아오고 있소.

 7000년 전 이집트 사람들은 아침 해를 호루스라 하고 해질 녘의 것을 오시리스라 불렀소.

 하늘에는 도무지 예도 이제도 없소. 이런 하늘과 하늘의 무궁한 밤낮 주기에 나는 해와 달 그리고 밤하늘 뭇별들로 하여금 거기에 사활(死活)을 건 의미를 바치게 되었소.

 그래서 천문(天文)은 곧 인문(人文) 아닌가요.

 18세기 독일 시인은 그의 자서전 첫머리에 자신의 탄생 별자리를 내걸고 있는데 나는 이런 수작 때문에도 그를 무척이나 어여쁘게 여기고 있소.

 어찌 내 어린 시절이라고 하늘의 별과 나와의 탄생 관계가 없겠소. 내 목숨을 점지한 것이 저 북두칠성이었으니 말이오. 자라나면서 ‘별의 삼형제’를 흥얼거리며 큰곰 별자리 삼태성의 그 까마아득한 무심(無心)을 지상의 생사 권속으로 근친화(近親化)함으로써 나의 세상이 트인 것이오.

 고대 이집트나 그 뒤의 바빌로니아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인도와 중국의 천문해석들은 거기서부터 종교니 예술이니 과학이니 낳기 시작한 것이오. 그래서 점성술이야말로 인간의 지적 존엄을 과시하는 한림원의 기원이겠소.

 동과 서 어디랄 것도 없이 개인의 화복과 나라의 안위흥망에 긴밀한 작용을 베푸는 별의 어명(御命)이야말로 황제를 하늘의 자식으로 자임케 하고 인간의 생사를 별의 운항으로 이어지게 했던 것이오. 그러므로 바닷가의 썰물·밀물도 우주의 밀물·썰물을 그대로 따르는 자동피동(自動被動)의 이치일 것이오.

 인류가 인간과 동물로 나누어질 까닭이 없던 시기라면 그 기나긴 세월 내내 하늘과 하늘의 별 운행에 대한 숭앙이 생겨날 필요도 굳이 없었을 것이오.

 이런 점에서는 한 마리 휘파람새나 보름밤 늑대에게 하늘에의 신앙도 별에의 사상도 무효인 그 천연의 무지(無知)가 역설적으로 외경의 대상이기도 하오.

 하지만 네 발이 두 발이 되고 두 발의 삶이 한 곳에서 낯선 사바나로 결연히 떠난 이래 그 타고난 역마살의 유전(流轉)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인류 세계 판도를 펼치게 되었소. 새삼 인류사적 여수(旅愁)가 쌓인 것이오.

 인류의 지혜가 아주 느리게 한두 가지씩 쌓여오는 동안 하늘과 별에의 귀의가 있게 된 것은 결코 몽상 때문이 아니었소. 우주를 상상력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에의 방어적 직감이나 긴급 과제로 삼았던 것이오. 그토록 기나긴 세월의 채집 유목 시대에는 하늘의 형세와 별의 주기야말로 삶의 행방을 지배했던 것이오. 아니, 생사여탈을 주재했던 것이오.

 별이 단지 몇 백 광년 저쪽의 고체·기체인 것이 아니라 별들의 힘이야말로 이 지상 명운을 하나하나 쥐고 있는 ‘성관(星官)’이었고 ‘성신(星神)’이었소.

 불교 밀교에서의 ‘성(星)만다라’의 대장엄도 누군가가 심심풀이로 만들어본 시끌덤벙한 도상(圖像) 한 폭만이 아닐 것이오.

 나는 북극성이나 다른 별들을 몇 번이나 내 어쭙잖은 작품 속에 담아보았소. 세상의 시인들에게 하늘은 입버릇이었소.

 북극성은 오랜 항해 생활의 원표(元標)임에 틀림없소. 특히 이집트와 인도가 우주의 중심을 태양에 두고 있는 것에 대응하듯 동양에서는 북극성이 천계의 으뜸이오. 최근 천체물리학의 관찰로는 북극성의 위치도 이동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북극성은 우리 조상에게는 우주의 중심이었소.

 내 허약한 기억력으로는 다섯 살께이던 1930년대 후반 여름밤에 나는 처음으로 별을 보았소. 이를테면 내 존재라든가 세계 또는 우주라든가 하는 그런 심각한 개념 따위가 전무한 그 유년의 깜냥으로 고모의 등에 업힌 아이의 눈에 밤하늘이 내려왔던 것이오.

 식민지 수탈 체제와 전래하는 고질의 빈곤이 어우러진 때였소. 들녘의 풍년 격양가는 바로 후방 병참기지의 군량(軍糧) 강탈로 무색했소.

 신새벽에 먼 바닷가로 나문재를 뜯으러 나간 어머니는 한밤중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소. 어린 나를 업은 고모와 함께 나는 배고픈 나머지 울음을 터뜨릴 힘도 없었소.

 그때 별을 보았던 것이오. 별이 밥으로 보였소. 땅 위에 반짝 내려온 능금만 한 복숭아만 한 별들이었고 한 사발의 밥만 한 별이었소. ‘별 따 줘’가 아니라 ‘저것 따 줘’가 내가 별에게 한 최초의 말이었소.

 이런 별과의 첫 해후 때문에 나는 별에 대한 정서 결핍을 모면하기 어려웠소. 그래서 ‘별 하나 나 하나’ 운운의 동요에도 내심으로는 어떤 수치심이 찼던 것이오. 더구나 한평생을 별을 노래해야 하는 시인의 운명 첫머리에 별을 우주의 신비 정서나 꿈의 표상으로 섬기지 못하고 주린 창자 메울 밥 한 덩어리로 만난 사실은 아무에게도 발설할 수 없었소.

 겨우 70년대에 이르러 내 시의 한 영역이 현실과 사회 설정(設定)으로 드러날 때 그 생존을 위한 지상의 절실성 때문에 별을 밥으로 만나야 했던 숨은 체험이 차라리 명예로웠던 것이오. 그래서 별이야말로 굶주린 자의 밥처럼 노래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강조한 처지이기도 했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밤하늘이 없소. 깜깜한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별들의 숭고한 축연(祝宴)을 잃어버렸소. 어쩌면 좋겠소. 감히 말하오. 우리들의 새로운 천문해석학으로 천문과 인문이 하나인 그곳 하늘과 사람이 하나인 이곳을 열어 가자고.

 오늘 하루도 하늘로 시작하오.

고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