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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제멋대로 '훈민정음체' 관인 4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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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숙
정재숙 기자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정재숙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서예가 이정호(55·세종글꼴문화원 대표)씨는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볼 때마다 가슴이 쓰리다. 동상 아래에 쓰인 글씨체가 겉모습만 훈민정음 서체일 뿐 창제 당시 글꼴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외형만 호랑이를 그렸다 하고 실제는 성격이 다른 표범을 묘사해 놓은 것과 같은 모양새다. 세종대왕이 반포한 1446년 당대의 서체가 지닌 자모음의 형태와 짜임새, 글자꼴의 변화와 제자 원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벌어진 일이다.

 예를 들어 위아래 자음 폭과 중간 ‘ㅡ’ 모음 폭이 같아서는 안 되는데 모두 똑같이 써 놓았다. 점 획은 모음 획의 굵기보다 더 통통해야 하는데 한결같다. ‘ㅣ’ 모음 종류는 옆 자음 중간에 있어야 하는데 다 아래로 치우쳐 있다. 잘못된 컴퓨터 폰트체를 그대로 가져다 쓴 데서 온 오류다.

 이씨는 이런 한글체의 왜곡이 정부기관에서 찍어 주는 각종 관인(官印)의 서체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음을 알고 놀랐다. 나랏일을 집행하는 서류에 인증(認證)의 상징으로 찍는 공인된 도장의 글씨체가 근원을 알 수 없는 한글체로 중구난방이라면 그 정부기관에 대한 신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문서 위조의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

 정부가 한자 전서체(篆書體) 일색이던 전국 관공서의 직인을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서체로 새겨 써야 한다고 공포한 것은 2011년 3월 25일이었다. 시행 4년이 넘었다. 당시 행정안전부(현 행정자치부)는 사무관리규정 시행규칙 중 공인조례를 고쳐 ‘한글 전서체’에서 ‘순수 한글체’로 바꿔 사용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관인을 국민이 쉽고 간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였다.

 원래 한글 전서체란 규정 자체가 엉터리였다. 전서체는 한자 서체의 한 종류다. 그러니 ‘훈민정음체’나 ‘용비어천가체’ 등 순수 한글체로 관인을 만들자는 뜻은 좋았다. 문제는 각 중앙행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현장에서 받아들여 시행한 결과였다. 광화문 세종대왕상 아래에 새겨진 서체와 비슷한 오류가 대부분의 관인에서 발견됐다. 일반 획에 단순히 점만 붙여 쓴 ‘훈민정음체’, 자모음의 조화를 생각하지 않은 얼치기 ‘용비어천가체’가 중구난방으로 오·남용되고 있다. 전각(篆刻) 전문가들은 훈민정음체를 보고 그린 수준이라고 혀를 찬다.

 최근 한국전각학회 등 관련 전문기관들은 모든 관인을 관리하는 전담기구 설치를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조선시대에는 관인 업무를 담당하는 계제사(稽制司)가 전국의 관청이 요청한 관인 주조를 총괄했다. 관인 문화를 바로잡는 일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국기(國基)를 바로잡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정재숙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