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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눈부셔 눈물나는 ‘샛노란 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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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식·지상악 부부가 함께 일군 경남 거제 공곶이의 수선화 밭을 걷고 있다. 수선화가 만개하는 봄이 되면 입소문을 접한 사람들이 알음알음 공곶이로 모여든다.

한낮에 노란 별이 떴습니다. 쏟아지는 봄의 유혹을 견디지 못한 수선화가 일제히 꽃망울을 터트렸습니다. 수만 송이 수선화가 낭창낭창 흔들리는 이곳은 경남 거제시 일운면 예구마을 공곶이입니다. 공곶이는 땅이 엉덩이처럼 바다 쪽으로 튀어나와 있다고 해서 엉덩이 고(尻)자, 그런 지형을 뜻하는 곶(串)자가 합쳐진 이름입니다.

공곶이에는 올해 평년보다 3~5일 앞서 수선화꽃이 피었다네요. 개화일은 지난달 20일이었습니다. 공곶이는 수선화가 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은 터여서 지난 1일 서둘러 거제도로 내려갔습니다.

노부부의 맞잡은 두 손.

공곶이는 예쁘게 꾸민 정원이 아닙니다. 입장료를 받는 관광지는 더욱 아닙니다. 1957년 부부의 연을 맺은 강명식(84)·지상악(80) 부부가 69년 정착해 꽃과 나무를 키운 삶의 터전입니다. 공곶이는 반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노부부의 일생입니다.

황무지에 불과했던 14만9000㎡(4만5000평) 땅에 3만3000㎡(1만 평) 면적의 경작지를 만들었습니다. 호미·곡괭이·삽으로만 작업을 했으니, 손으로 빚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밭입니다. 경사가 급해 농기계를 쓸 엄두를 못 냈답니다. 부부는 깊이 1m 너비 1m 땅을 파내고 일일이 돌을 괴어 밭을 만들었습니다. 부부는 피와 땀으로 얻은 밭뙈기에 50종이 넘는 꽃과 나무를 부지런히 심었습니다. 종아리 언저리에서 그쳤던 짤따란 묘목은 어느덧 당신들의 키를 훌쩍 뛰어 넘는 고목으로 자랐습니다.

공곶이 농원은 한려해상국립공원 안에 있습니다.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 농원에서 바라보는 남해 바다 풍경이 일품입니다. 농원에서 바다를 내다보면 봉긋 솟은 내도가 보입니다. 내도에 가려 안 보이지만 내도 너머로는 그 유명한 외도가 있지요.

맑은 바다와 어우러진 공곶이는 사시사철 아름답지만 특히 봄 풍경은 말 그대로 절경입니다. 지난 가을부터 꽃을 피운 동백나무가 여전히 붉고, 3월 하순에는 수선화가 만개합니다. 뒤이어 조팝나무와 설류화가 순번을 이어 꽃을 틔웁니다.

꽃은 공곶이에 상춘객을 불러 모았습니다. 입소문만 듣고 알음알음 찾아드는 이가 이제는 제법 됩니다. 3~4월이 되면 주말에 1500여 명이 공곶이를 드나든다고 하네요. 2007년 거제 8경으로 선정된 뒤에는 관광 버스를 빌려 찾아오는 단체 여행객도 생겼습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불쑥 농원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다반사가 된 셈입니다.

공곶이가 유명해졌다고 해서 당신들의 일감이 줄거나 살림살이가 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관광지가 아닌 탓에 공곶이에는 쉬어가는 벤치도, 번듯한 매점도 없습니다. 갈증이 나거나 화장실 용무가 급한 이들은 쪼르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달려가게 마련입니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밭에 들어가서 꽃 뿌리를 밟는 사람도 더러 있다지요.

본데없는 사람들이 징글징글할 법도 하지만 부부는 농원의 문을 닫아두는 일이 없습니다. 먼데까지 찾아온 이들을 내칠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고 즐겨준다면 그것으로도 행복하다 합니다.

여든 넘은 노부부의 너른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공곶이의 풍경은 눈부시다가도 눈물겹습니다. 서로 보듬으면서 땅을 가꿔온 부부의 질박한 삶이 꽃보다 더 은은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week&이 두 부부에게서 따뜻한 봄을 만나고 왔습니다. 쨍쨍한 볕 아래 싱그러운 수선화향이 모락모락 피어났습니다.

강명식·지상악 부부가 서 있는 곳은 원래 감귤밭이었다. 지금은 수선화와 종려나무가 밭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공곶이에 핀 봄꽃들. 위에서부터 옥매화 · 복사꽃 · 무스카리 · 명자꽃.

46년 한땀한땀 돌밭을 꽃밭으로 … 꽃부부 사랑의 결실이죠

‘수선화 천국’ 일군 팔순 할배·할매
강명식(84)·지상악(80) 부부는 1969년 공곶이에 정착해 황무지를 화훼 농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어김없이 수선화가 핀 봄날, week&은 노부부와 함께 공곶이 농원을 걸었다. 지상악 할머니에게 강명식 할아버지는 이미 ‘할아버지’이지만 강 할아버지에게 지 할머니는 아직 어여쁜 ‘아가씨’다. 58년을 해로했으니 노부부는 자신의 삶보다 자신 반쪽의 삶을 얘기하는 게 더 쉽다고 했다. 지 할머니가 풀어놓은 남편의 이야기, 강 할아버지가 들려준 아내의 이야기를 노부부의 육성으로 전한다.

지상악 할머니 이야기

공곶이 돌담. 파도를 막기 위해 노부부가 직접 쌓았다.

우리 할아버지 얘기 들려줄까요. 1957년 이른 봄이었지요. 경남 거제 예구마을에 있던 우리집에 온 동네 사람이 죄다 모여들었어요. 뭍에서 제 신랑감이 온다는 소문이 쫙 퍼졌던 거지요. 경남 진주 문산읍에 살던 할아버지는 반나절 걸려 거제에 왔다고 해요. 오는 길이 험해서 그랬는지, 구경꾼들 눈이 불편해서 그랬는지 할아버지는 내내 뾰로통하더군요. 한 달이 지나고 약속한 날짜에 우리는 예구마을에서 백년가약을 맺었어요. 결혼 미사를 마치고 우리는 공곶이로 산책에 나섰어요.

공곶이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그날따라 반짝거렸죠. 나야 자주 보는 것이니 심드렁했는데 여태 시큰둥했던 할아버지 얼굴이 환히 피더이다. 그땐 몰랐어요. 그 돌밭을 내 손으로 매만지게 될 줄은.

식을 올리고서는 대구에 정착했어요. 할아버지는 신문 공장에서 일을 했어요. 객지 생활 12년째 되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말했지요. 공곶이로 가자. 결혼 첫날부터 내내 마음에 품고 있었던가 봐요. 반대를 하진 않았느냐고요? 공곶이에서 봤던 할아버지 미소가 아른거려서 그럴 수 없었어요. 69년, 우리는 전기도 없고 가스도 없는 공곶이에 들어와 뚝딱뚝딱 집을 지었어요.

공곶이에서 1㎞ 떨어진 돌고래 전망대.

우리 둘 다 촌에서 자랐으니 농사일이 두렵지는 않았지요. 한데 공곶이 언덕에는 평지라곤 한 뙈기도 없더군요. 곡괭이로 땅을 파고 땅에서 나온 돌을 괴어 논도 만들고 밭도 만들었어요.

지금 보이는 수선화밭에 처음 심었던 건 감귤나무였어요. 71년인가 군청에서 보리쌀을 나눠주면서 감귤농사를 권하데요. 마을에서는 감귤나무를 대학나무로 불렀어요. 몇 그루만 갖고 있으면 아들 딸 대학 정도는 보낸다고 했어요. 그해 우리도 감귤나무 2000주를 심었어요. 버스비가 100원 남짓하던 시절에 15㎏ 감귤 한 상자가 1만원은 족히 됐어요. 우리 부부는 6남매보다 더 감귤나무를 애지중지 아꼈죠.

5년을 기른 감귤나무를 잃은 건 한순간이었어요. 76년 겨울 거제도는 영하 13도까지 내려갔어요. 감귤나무는 누런 열매를 단 채 꽁꽁 얼었지요. 수확이 코앞인데 우리는 열매 한번 못 따보고 감귤밭을 엎었답니다.

이듬해 봄에는 유자나무를 길렀어요. 유자를 일본으로 수출하면 아기 머리만한 열매 하나에 1000원을 받는다는 말을 들었죠. 그해 봄날, 하늘은 무심했어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어요. 말라죽은 유자나무를 뽑아낸 밭은 한동안 텅 비어있었어요. 할아버지는 말 한마디 않고 속앓이를 했나 봐요. 그 까맣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새더라고요. 그때부터였을까요. 우리 신랑을 할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는 청춘이에요. 지금은 첫째아들과 양아들이 일을 돕는데 공곶이에서 할아버지보다 팔팔한 사람은 없어요. 8년 전에는 우리 농원 비탈길을 따라 모노레일을 달았어요. 할아버지는 숨이 붙어있는 한 이 땅을 지킬 거예요.

강명식 할아버지 이야기

우리 아가씨 얘기? 머슴 부리고 살던 아가씨가 평생 나 따라다니느라 고생한 얘기? 인연이었다, 운명이었다 말고 또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결혼 미사를 마치고 아가씨랑 처음 온 데가 공곶이야. 내도랑 해금강이 내려다보이는 것이 여기가 천국이구나 했지.

공곶이에 땅이 있는 사람이 뭍으로 이사 간다는 얘기를 들었어. 우리 부부는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공곶이로 냉큼 내려왔어. 땅을 살 돈이 턱없이 부족했지. 앞마당에 글라디올러스 세 뿌리를 심어놨는데 어찌나 번식력이 좋든지 3년 만에 900뿌리를 얻었지. 이걸 팔아서 공곶이 땅 일부를 샀어. 돈이 생길 때마다 주변 땅을 조금씩 사들였지.

바다와 어우러진 공곶이 풍경. 바다 한가운데 내도 섬이 있다.

신바람나는 날도 있었지. 저기 야자수처럼 생긴 나무 보이지? 그게 종려나무야. 잎이 난처럼 길쭉하고 도톰해. 결혼식이나 장례식 화환에 꼭 들어가는 게 종려나무 잎이야. 90년대에는 일주일에 한 트럭씩 잎을 따다 뭍으로 날랐지. 아가씨랑 나랑 통영 버스터미널까지 가서 고속버스에 싣고 서울로 보냈어. 일주일에 100만원은 너끈히 손에 쥐었지. 2000년대 들어서는 판로가 뚝 끊겼어. 이젠 플라스틱 잎을 쓴다고 하대.

감귤나무는 냉해로 잃고 유자나무는 가뭄으로 죽고 종려나무는 무용지물이 됐어. 그때 우리를 구해준 게 수선화야. 79년인가? 부산에서 집에 돌아오려고 버스터미널로 가는데 작은 종묘상이 있더라고. 샛노란 꽃을 팔고 있데. 수선화였지. 주머니를 뒤져보니 버스비를 빼면 딱 두 뿌리 살 돈밖에 없는 거야. 아가씨가 두 뿌리를 우리 집 뒷마당에 심었어.

세월은 성큼성큼 가더군. 10년이 지나니까 뒷마당을 꽉 채울 정도로 수선화가 그득했어. 뿌리를 나누고 약한 줄기나 잎은 솎아내고 흙을 덮어주니 한 뿌리가 두 뿌리 되고 두 뿌리가 네 뿌리로 불었어.

20년이 지나니까 어디 내다 팔아도 될 정도는 됐지. 아가씨가 거제 장승포 옥수시장에 가서 수선화를 팔았어. 지금도 수선화는 우리 부부의 생계 수단이야. 화훼시장에 수선화 알뿌리를 팔지. 1년에 2000만원은 버니까 늙은이 둘이 사는데 모자란 건 없어. 30년이 흐르니까 사람들이 ‘수선화 천국’이라면서 우리 집에 찾아오데. 감사하지. 남들은 근사한 경치 구경하려 평생 돈을 모은다는데 우리 부부는 이미 천국에 살고 있지 않나.

사람들이 왜 입장료를 받지 않느냐고 물어보는데 아가씨랑 나는 우리 집에 오는 손님에게 일일이 돈 받을 생각은 없어. 대신 고마운 마음에 수선화 화분과 수선화꽃을 하나 둘 사주는 사람은 있어. 꽃은 무인 판매대에서 팔고 있어. 돈을 내는지 안 내는지 지키는 사람도 없어. 10년 전만 해도 그냥 가져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요즘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어진 것 같아.

손님치레가 피곤하긴 해. 사진 찍는다고 밭에 들어가서 꽃밭을 망가뜨리는 사람도 더러 있지. 한데 먼 데까지 찾아온 이들에게 얼굴 찌푸릴 수가 있나. 우리 부부가 있는 한 공곶이 문은 언제고 열려있을 거야. 부디 우리가 평생 가꿔온 이곳을 함께 아껴줬으면 좋겠어.

글=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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