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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리콴유에게 배우는 한·일 외교의 해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20호 02면

일본 도쿄의 주일 한국문화원이 지난 25일 밤 불에 그슬렸다. 달아난 방화범은 반한 감정을 가진 우익 분자로 보인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지만 최근 들어 일본 내의 반한 감정이 위험수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반한을 넘어 혐한(嫌韓)에 이른 일본인들의 정서는 2012년 12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 발족 이후 갈수록 심각한 양상을 보여 왔다. 얼마 전 한 일본 민방은 “한국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한 파트너가 아니다. 한국은 반일로 자멸할 파산국가”라는 코멘트를 내보냈다. 또 “지금 한국의 반일 풍조가 고조된 이유는 그동안 일본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뒀기 때문이다” “한국은 버블 붕괴와 디플레이션으로 2~3년 내에 붕괴할 것이다”는 말도 전파를 타고 일본인들의 안방에 전달됐다.

 일본에서 반한 감정은 더 이상 극우의 전유물이 아니다. 평범한 일본인들에게도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 서점에는 『한국경제 벼랑 끝』『한국경제가 붕괴할 수밖에 없는 이유』 등 선정적 제목의 책들이 넘쳐난다. 지성의 전당이어야 할 대학에서도 이른바 ‘반한 교수’들이 한국 유학생들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지경이 됐다.

 정부 레벨의 정치적 대립은 사안에 따라 고조되기도 풀리기도 한다. 하지만 국민까지 상대방에게 근거 없이 격앙된 감정을 지니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일본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도 반일 감정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이게 실리적으로 추진해야 할 경제교류나 안보협력을 고비마다 가로막곤 한다. 2012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 서명식 당일 깨진 게 대표적인 사례 아닌가. 얼마 전 한·일 통화스와프 협정의 만료에도 경제적인 고려 외에 감정적인 영향이 없었다곤 보기 어렵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 교과서, 영유권 분쟁이 불거질수록 양국 국민의 상대방 국가에 대한 반감은 상승곡선을 타기 마련이다. 양국 정권이 이를 방치하거나 때론 활용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감정에 편승해 정치적 이익을 노렸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27일자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의 희생자”라고 표현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위안부 강제 동원의 주체를 일본군이나 관헌이 아닌 민간업자들에게 돌리려는 ‘물타기’ 의도가 잘 드러난다. 위안부 희생자들에게 동정을 표하긴 했지만 일본 정부 차원의 사과·배상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기존의 자세를 재차 강조한 것이다.

 우리가 먼저 흥분할 필요는 없다. 아베와 아베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일본인 전체를 배척하거나 증오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국민은 영원히 대를 이어간다. 정부와 정치인 탓에 양국 국민의 마음이 서로 멀어진다면 도대체 누가 이익을 보겠나.

 29일 싱가포르 국부 리콴유 초대 총리의 장례식이 열린다. 그는 생전에 감정을 배제한 철저한 실용주의 외교로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잔학한 점령통치를 했던 일본도 선뜻 용서해줬다. 그토록 혐오했던 공산주의자들과도 손을 잡았다.

 그를 추모하며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익 우선의 실용외교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아베 정권에 대한 반감은 반으로 숨기고, 일본 국민에 대한 관심은 배로 늘릴 필요가 있다. 더 늦기 전에 실리적인 ‘투 트랙’ 전략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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