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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선거구 ‘무조건 수용’ 규정 도입해 게리맨더링 막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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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호 04면

지난해 11월 헌법재판소의 선거구 획정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선거구 조정 대상이 된 지역구 의원들이 국회에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새누리당 장윤석 의원, 새정치민주연합 이윤석 의원, 새누리당 황영철·이철우·박덕흠·김종태 의원, 새정치연합 김승남 의원. [중앙포토]

#새누리당 한기호(철원-화천-양구-인제) 의원은 선거구 획정 얘기를 꺼내자 “나도 모르겠다”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전국에서 가장 넓은 지역구를 뒀지만 상주인구(13만1000명)가 부족해 선거구가 다른 곳과 통합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군부대와 지자체까지 동원해 인구를 끌어모으고 있지만 여전히 8000여 명이 부족하다. 한 의원은 “가는 곳마다 인구를 얼마나 채웠느냐고 물어본다”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고 나머진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정치개혁, 지금이 골든타임] <상> 선거구 통폐합

한국 정치에 개혁의 바람이 거세다.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가 현행 3대 1인 국회의원 선거구 최대 인구편차를 올해 말까지 2대 1로 줄이라는 선거법 개정 결정 이후 그동안 봉인됐던 정치 개혁 논의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정치권과 학계,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까지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중에서도 선거구를 통폐합하거나 재조정하는 선거구 획정이야말로 국회의원들의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엇갈린 고차방정식이다.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 대부분이 “선거구 획정의 방향이 정해져야 공천제도 등 다른 정치 개혁 과제들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만큼 이번 선거구 획정은 많은 국회의원에게 생사가 걸린 문제다. 자칫하면 자신의 지역구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 지난 1월 말을 기준으로 헌재의 인구 수 상한 기준을 초과하는 지역구는 35개, 하한 기준에 미달하는 지역구는 24개다. 총 59개 지역구가 선거구 재획정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선거구를 조정하다 보면 인근 지역까지 영향을 받게 돼 조정 대상이 최대 120~130곳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사실상 선거구 지도가 다시 그려지는 셈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인구 부족으로 선거구가 통폐합될 위기에 놓인 24개 지역구 의원들이다. 선거구 재획정 결과가 자신의 정치 생명과도 직결될 수 있다. 중앙SUNDAY는 이들 24명의 의원을 대상으로 선거구 재획정에 대한 전화 설문조사를 했다. 총 19명이 응답했고, 5명은 응답을 거부하거나 개인 일정을 이유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우선 선거구획정위원회를 어디에 설치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여야 합의대로 외부 독립기구로 설치하자는 의견과 현행대로 국회 내에 두자는 의견이 각각 8명(42%)과 7명(37%)으로 팽팽하게 맞섰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선거구 획정은 기본적으로 법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입법부인 국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국회의원들이 자기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해 선거구 획정 결과가 왜곡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전문성을 갖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위탁해야 한다’는 의견(3명)도 나왔다. 선거구 통폐합의 당사자 격인 이들의 의견부터 크게 다른 상황이어서 정개특위가 앞으로 다양한 견해를 어떻게 수렴해 내느냐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기구 구성과 관련, 선거구획정위에 정치인이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에는 무려 68%(13명)가 동의했다. 한 재선 의원은 “여야에서 한 명씩이라도 국회 입장을 대신할 위원들이 참여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은 “의견이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 줄 정치 경륜을 지닌 전직 의원이 포함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선거구를 재조정하면서 국회의원 정수를 늘려야 할지에 대해서도 여야 간에 주장이 엇갈렸다. 새누리당은 절반 이상이 “비례대표 의석수를 줄여 지역구 의석수를 늘리더라도 의원 정수를 그대로 유지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새정치연합 의원들은 “의원 정수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 익명을 요구한 야당 의원은 “선진국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원 수를 상향 조정할 필요가 있다”며 “정치권이 비난 여론을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소 옮기기 운동에 지역구 사수 법안까지
지역구를 지키기 위한 의원들의 노력은 선거가 다가올수록 더욱 필사적이다.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과 박덕흠(보은-옥천-영동) 의원의 지역구에선 지자체와 군부대 등이 동원돼 대대적인 주민등록 주소 옮기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헌재가 제시한 인구 하한선(13만9000명)을 넘기기 위해서다. 부족한 인구를 메우기 위해 유권자가 주민등록지와 관계없이 고향에서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고향투표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새정치연합 황주홍 의원)까지 나왔다.

여야 농어촌 의원들은 지역구를 사수하기 위한 공동 대응에 나섰다. 인구 못지않게 면적이나 지역의 대표성도 고려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인구와 상관없이 국회의원이 대표할 수 있는 기초자치단체를 3개로 한정하고, 선거구 면적이 전체 선거구 평균 면적의 두 배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도 발의한 상태다. ‘농어촌 지방 주권 지키기 의원 모임’ 간사인 새누리당 황영철 의원은 “도시 지역 의원 수는 늘어나고 지방과 농어촌 의원 수는 줄어들게 될 것이 뻔한데 이런 식의 국회의원 구조는 국가 균형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지역구 나눠먹기 원천 봉쇄해야
정치권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정치학자들은 선거구 획정의 ‘정치화’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선거구를 재조정하면서 자칫 정치 논리에 휘말릴 경우 기형적인 타협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명지대 김형준(정치학) 교수는 “선거구 획정에 정치인이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이를 파행으로 몰고 가는 잠재적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색깔을 완전 배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 19대 총선까지 선거구획정위가 모두 다섯 차례나 구성돼 활동했지만 번번이 유명무실한 역할에 그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선거구획정위에서 결정된 방안이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국회에서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멋대로 선거구를 정하는 것) 현상이다. 2012년 19대 총선 당시 선거구획정위는 서울 2곳과 대구, 전남의 선거구를 줄이고 경기도 5곳과 강원도, 충남 선거구를 늘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여야는 획정위의 안은 무시한 채 경기도와 강원도의 선거구를 하나씩 늘리고 세종시를 추가하는 대신 전남과 경남의 선거구를 줄이는 식으로 맘대로 결정했다. 18대 총선 선거구획정위원으로 참여했던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결국 여야 간 결정에 따라 선거구가 정해졌기 때문에 획정위는 있으나 마나였다”고 말했다. 명지대 윤종빈(정치외교학) 교수는 “선거구획정위의 안을 ‘무조건’ 수용하는 강제규정을 마련해 국회의 수정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의 게리맨더링을 방지하기 위해 지역의 ‘조밀성’을 선거구 획정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지역 내 공공기관의 위치나 생활권을 고려해 선거구를 나눠야 한다는 뜻이다. 평택대 강휘원(행정학) 교수는 “선거구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지역민이 의사를 정당하게 표출할 수 있느냐가 결정된다”며 “지형과 교통, 생활권 등을 고려해 지역 공동체의 특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선거구를 획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권필 기자·박종화 인턴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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