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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간 30대, 회식중 건배하다 돌연사…법원, '공단 산재거부' 뒤집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13년 생산직 근로자 김모(당시 49세)씨는 휴게실에서 쉬다가 작업장으로 복귀하던 중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숨졌다.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와 관련성이 없다”며 유족급여 및 장의비지급을 거부하자 그해 유족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최근 “김씨가 3개월 근무 중 이틀만 쉬는 등 육체적 스트레스가 상당했다”며 과로사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정식 근로계약 전 수습기간동안 근무를 평가받던 상황이라 정신적 피로도 상당히 누적된 것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그러나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공단이 항소해 서울고법에서 2심이 진행중이다.

#2009년 10일간 중국 출장을 갔던 이모(당시 33세)씨는 마지막 날 동료들과 회식 도중 건배를 하다 쓰러져 숨졌다. 현지 병원은 이씨의 사인을 ‘급사’로 기재했다. 공단은 “사인이 불명확해 업무와 관련성을 판단할 수 없다”며 보상을 거부했다. 유족들은 6년 소송 끝에 지난달 서울고법에서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선고 요지는 “출장중 업무시간과 내용으로 볼 때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누적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근로복지공단은 돌연사는 대개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는다. 업무와 직접 연관성을 입증하기 힘든 ‘과로사(뇌혈관· 심장질환이 주원인)’는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최근 공단의 판정에 불복해 유족들이 소송을 내는 사례가 늘고 승소율도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2009년 공단을 상대로 한 산재소송 승소율은 9.4%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해 유족급여 소송 389건 중 68건(17.5%)에서 유족이 승소했다. 올해 1~3월 서울행정법원의 관련 판결 선고 33건 중 8건(24.2%)에서 공단 판정이 뒤집혀 산재로 인정됐다.

이는 공단의 과로사 산재 판정이 법원보다 훨씬 엄격하다는 뜻이다. 공단이 정한 과로의 기준은 발병전 1주일 이내 업무량이 30% 이상 증가(급성과로)했거나, 발병 전 3개월 이상 연속적으로 일상업무보다 과중한 부담(만성과로)이 있었다고 입증해야만 산재로 인정한다. 더욱이 근로복지공단 산재보험연구센터에 따르면 뇌혈관질환(뇌실질내출혈·지주막 하출혈·뇌경색)과 심장질환(심근경색증·해리성대동맥류)의 산재 승인율은 14.6%(2010년 기준)다. 일반 산재승인율(30%)의 절반에 못 미친다.

산재 사건 전문 조영기 변호사는 “의료기관들의 사망 원인 진단이 180도 다른 경우도 있어 법원이 어느 진단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법원 내에서도 판단이 엇갈린다. 회사 셔틀버스 운전기사 강모(사망당시 29세)씨는 2009년 회사 회식뒤 귀가하던 중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나 공단이 산재를 인정하지 않자 소송을 냈다. 1심은 “과로나 스트레스가 막연히 질병의 발생·악화에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망과 인과관계를 추단하기 어렵다”고 봤다. 하지만 항소심은 “회사에서의 대기시간도 업무의 연장이기 때문에 주당 근무시간이 94.9시간이라고 봐야 한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전문가들은 몇년씩 걸리는 소송 비용 등의 낭비를 줄이려면 법원 판례를 바탕으로, 과로사의 산재 인정 기준을 속히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영일 노무사는 “업무상 재해·과로사·스트레스에 대한 대법원 판례에 따라 기준을 만들고 공단이 수용하면 소송 건수가 줄어들고 장기 소송에 따른 유족들의 고통도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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