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베트남전이 과거사라면 한미동맹은 뭐가 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지난 6일(현지시간) 정의화 국회의장이 방미 일정을 쪼개 워싱턴에서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 등을 만나 오찬으로 격려했다. 틸럴리 전 사령관은 정 의장에게 한·미동맹을 강조하며 “미군 파병엔 항상 한국군이 같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은 베트남전에 미국에 이어 두 번째 규모로 참전했고 전사자도 많았다”고 예를 들었다.

 베트남에는 1964년부터 73년까지 총 32만여 명의 한국군이 파병됐다. 이에 따른 한국군 전사자만 5000여 명에 달한다.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가 유행했을 때가 이 즈음이었다. 파병 중 미국이 지원한 한국군 유지 비용과 이후 미국의 대한 원조는 한국 경제에 피가 됐지만 한국군의 희생 역시 컸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성격의 ‘베트남전과 한국’ 평가도 있다. 데니스 블레어 전 미국 국가안보국장은 지난해 8월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 세미나에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미국군이나 다른 나라의 군대보다 더 무자비했다는 취지로 밝혔다. 블레어 전 국장의 이날 강연 주제는 ‘역사가 동북아의 미래를 향한 발전을 늦추고 있다’였고, 그는 강연 도중 한·중·일 3국 모두 고통스러운 과거사가 있다고도 지적했다. 물론 블레어 전 국장은 미국 역시 노예제와 인종차별 등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블레어 전 국장은 지난 1월 한 세미나에서도 베트남전 얘기를 꺼내 한국군이 무자비했다고 재차 거론했다.

 하지만 한국 역시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는 취지로 블레어 전 국장이 베트남전을 들었다면 이는 적절한 예가 아니다. 과거를 직시하는 것은 과거를 속이려 들지 않는 것인데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은 재임 중 베트남 정부에 이미 사과와 유감을 표명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희생당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재를 부정하며 차마 글로 표현하기 곤란한 ‘직업 여성’으로 몰아가려는 일본 일부의 태도와, 베트남전이 공론화돼 베트남과의 관계 악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는 한국인들의 속내를 같은 선상에 올려 놓는다면 어불성설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베트남전 파병의 배경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의 노력에 한국이 ‘집단적 자위권’으로 참여한 사례였다. 파병에는 경제 개발과 주한미군의 철수 우려 등 한국의 국익이 작동했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한·미가 군사동맹이었기 때문에 파병이 이뤄졌다. 군사동맹이 아니었다면 한국이 미국의 전쟁에 가세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당시의 파병 맥락을 생략한 채 베트남전을 한국군의 과거사로 낙인을 찍는다면 한·미 군사동맹에 대한 믿음을 훼손시킬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베트남전이 한·중·일 3국의 과거사 갈등에 끌어다 붙일 소재는 아닌 듯싶다.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