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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와 탑기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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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런던특파원

BMW M6 그란 쿠페, 닛산 GT-R, 벤틀리 콘티넨털 GT V8S.

 시중의 우스개가 떠오릅니다. 남자들은 정확한 이름을 댑니다. BMW M6 그란 쿠페는 BMW M6는 물론이고 BMW M6 쿠페와 전혀 다르다는 걸 아니까요. 여자들은 그저 ‘외제 차’로 인식합니다.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차에 무심하다는 걸 단순화한 유머입니다.

 설령 이름을 모른들 이런 고급 차들이 호주의 건조지대를 질주하며 4000마리의 소를 우리 안으로 몰아넣는 건 신기한 일입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깎아지른 듯한 광산용 도로를 경주하는 건 어떻고요. 쉰 살 안팎의 세 남성이 끊임없이 실없는 주장들을 늘어놓는 걸 보면서 김형경 작가의 ‘남자를 위하여’를 떠올리게도 됩니다.

 영국 BBC방송의 ‘탑기어’입니다. 전 세계 200여 개국에서 3억5000만 명이 본다는 자동차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입니다. 인기가 실감이 안 난다고요? BBC 기자는 페루의 오지 잉카 마을 사람이 자신이 영국인인 걸 알자마자 “스티그가 누구냐”고 물었다고 했습니다. 헬멧을 쓴 채 등장하는 익명의 전문 드라이버입니다. 이란에선 힐러리 클린턴의 인터뷰 때문에 결방하자 방송국에 항의 전화가 쇄도했다고 합니다. 2012년에만 1800만 파운드(약 301억원)의 수익을 냈다고 하지요. 상당수 나라에서 영국 하면 탑기어부터 떠올린다고 합니다.

 BBC가 이의 방영을 중단했습니다. 진행자 중 한 명인 제러미 클라크슨 때문입니다. 현란한 언어로 구설에 자주 올랐던 인물입니다. 지난 주말엔 촬영을 마치고 밤늦게 숙소로 돌아왔는데 따뜻한 스테이크를 먹을 수 없다는 이유로 노발대발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프로듀서에게 주먹까지 날린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떠오른다고요? 좀 더 복잡합니다.

 BBC 수뇌부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15일 방영부터 취소했습니다. 지난해 클라크슨이 흑인을 비하한 단어(nigger)를 썼다는 게 알려졌을 때 “한 번 더 논란이 되면 자르겠다”고 최후통첩했던 터입니다.

 처음엔 바로 해고할 듯한 기세였지만 숙고에 들어갔습니다. ‘탑기어=제러미 클라크슨’이어섭니다. 구설로 몇 년간 떠났을 때를 제외하곤 1988년 이후 줄곧 그랬습니다.

 이번 논란이 그를 해고할 만한 사안일까요? 그가 떠난 뒤에도 탑기어가 탑기어일 수 있을까요? 그가 돈을 싸 들고 구애해 오던 상업 방송사로 가 유사한 프로그램을 시작한다면? 세계적인 명성의 BBC이지만 클라크슨은 이미 BBC도 어쩌지 못하는 세계적인 거물이 된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BBC로선 앞으로도 계속될 클라크슨의 구설도, 또 그에 따른 BBC 명성에의 흠집도 감내해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막대한 손해를 보더라도 BBC가 ‘클라크슨은 본질적으로 피고용인’이란 걸 보여 줘야 할까요? BBC가 저울질 중인 질문들입니다.

 우린 종종 차악을 두고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곤 합니다. 지금 BBC가 바로 그렇습니다.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