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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양성 이씨-글 이만훈기자, 사진 양원배기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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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양성이씨의 시조는 이수광이다. 고려문종때 지나(송)에서 귀화해왔다. 그가 고려에 온 유래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당시 송과 빈번한 문물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사신으로 따라왔던 사람중의 하나가 아닌가 짐작된다.
그는 계단에 사신으로가 화평관계를 맺는데 공을 세워 삼중대광보국 양성군에 봉함을 받았다.양성은 현재 경기도평택·안성일대의 옛이름.
수광의 아들 신정은 이부상서에 오르고 손자 원의는 승지, 증손 영주는 상장군을 역임, 양성이씨가는 출발부터 화려했다.
영주는 또 충렬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며 더욱 튼튼하게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영주의 아들 정 또한 양성군에 봉해졌는데 다섯아들을 두었다.
큰아들은 수방.
원에 사신으로 갔을때 인물과 재능이 영종의 눈에 띄어 직성금인의 벼슬과 나해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춘부·인부·광부·원우의 네아들이 있어 위로 세아들은 모두 시중에 올랐고 막내 원부도 상서벼슬을 해 세상의 부러움을 샀다.사람들은「나해같이 되었으면」하는 뜻에서 「사나해」라고 한것이 「사나이」란 말의 기원이 됐다고 후손들은 말한다.
고려조의 문벌이었던 양성이씨는 새 왕조 조선이 들어서자 다수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일부는 불사이군>
수방의 세째아우 수인은 사문동에 들어가 72현에 꼽혔고 장손 옥도 조선조에서 자혜지중 추원사등의 벼슬을 내리고 동참을 종용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 사후 그의 절개를 기려 조선조는 정절공의 신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새시대」에 참여, 가문의 융성을 지켰다.
특히 세종에 이르러 새왕조가 새문화의 꽃을 피우려 들자 양성이문은 많은 인재를 내 이를 뒷받침했다.
세종때 유명한 전문학자이자 발명가인 정평공 이순지가 그 첫손에 꼽히는 인물. 수방의 고손인 순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맹상의 아들. 판중추원사에까지 올랐다.
세종의 명을 받아 김담·이장·장영실등과 함께 역법을 연구하고 간의규표·앙부일기·자결루등과 천문학 서적을 편찬했다. 그는 산학·천문·풍수등 자연과학의 대가였는데 김담과 함께쓴 칠정산내외편이 그중에도 유명하다.
순지의 조카 예 또한 판서까지 오른 인물. 그는 집현전박사로 있던1443년 의방유취의 편잔에 참여했고 공조판서로있던 성종7년 부여재가금지가부서두고 의견이 분분하자 조건부 개가혼을 주장, 채택함으로써 조선왕조의 기본방침이 되게했다.
이들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성종때 학자로 이름을 날린 이승소. 옥의 증손이자 람의 아들인 그는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 예문관제학시 명황계감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신숙주·강희맹등과 국조오례의를 펴내는가 하면 문집 삼란집을 남겼다. 그는 당시 문장으로 일컫던 서거정과 어깨를 나란히한 문인이었는데 특히 용모와 태도가 단아청정해 「금옥군자」 라고도 불렸다.
비극의 수양대군 쿠데타에서 양성이씨는 직제학으로 있던 이휘가 사육신의 반정모의에 연루, 죽음으로서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풍조가 생겼다. 이 휘는 사육신중 이개가 처남. 휘가 죽자 당숙 백량·흥수, 사촌 조·진 삼종인 유직, 당지 승명등이 벼슬을 버리고 숨어버려 세상에서 이들을 「은육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l592년 임란이 터졌다.충절의 가문 양성이씨는 너도나도 구국의 전선에 나섰다.
순국전사자만 10여명. 그중에도 충무공을 도와 싸웠고 노량해전에서 충무공과 함께 순국한 가리포첨사 이영남장군이 가장 알려진 인물. 그는 19세에 무과에 급제, 임란이 터질 당시엔 율포만호로 있었다. 원균이 첫싸움에 패전, 전선 1백여척을 잃고 겁이나 수군1만여명을 해산한 뒤 도망치려하자 이를 말리고 전라도좌수사로 있던 충무공 찾아갔다. 이로부터 7년간 충무공함대의 선두에서 역전의 공을 세웠다.

<충무공 신임 두터워>
충무공의 남다른 신임을 받아 충무공의 「난중일기」에도 그의 이름이 69번이나 나온다.
「7년전쟁」을 마무리 짓는 노량해전서 충무공을 따라 전사. 순국하니 그때나이 33세. 사후 병조판서가 추증되고 완도 충무사에 충무공과 함께 배향돼 나라 지키는 신령이 됐다.
나대용과 함께 거북선 제작에 참여하고 역시 노량해전서 순국한 이설도 양성이씨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자 생질 김천일과 증제 주를 불려 국난에 목숨을 바칠 것을 격려하고 고경명등에게 창의격문을 띄우고는 70노구로 항재로 달려가다 공주서 숨을 거둔 애일당 이광익도 양이의 충의정신을 드러낸 이름이다.
조선초를 통해 양성이씨 문과급제자는 14분 이중 군호를 받은 사람이 11명이며 공신28명, 왕자 사부 3명, 묘사 및 서원에 배향된 사람이 11명이나 된다.
벼슬은 참봉에 그치었으나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 율곡이 석촌존사라 불렀다는 이문령과 문장이 뛰어나 월사 이정귀등과 함께 낙중팔현으로 꼽히는 성리학자 이몽길, 그의 아들인 이득곤, 정조로부터 재옹이란 별호를 받은 이치현등은 학문·문장으로 양이를 빛낸 인물.
순조1년 천주교인들에 대한 신유옥사때 예수초상 3장을 그려 황사영에게 보낸 혐의로 처형된 최초의 서양화가 추찬 이희영, 성리학자로 1895년 민비가 시해되자 나주서 상소와 함께 격문을 띄웠던 석전 이백수등도 기억되는 이름. 한말 이능권은 만국평화회의에 밀파되는 이준열사를 국경까지 호송했던 인물. 고종의 밀령을 받아 강화에 「대동창의진」을 설치하고 군자금과 군량미를 모아온 뒤 수도탈환을 위해 동지들과 함께 서울로 잠입중 밀고로 왜찰에 잡혀 46세에 순국했다.

<예수초상그려 순교>
을사보호조약체결후 나주에서 죽봉 김태원의사와 함께 의병을 모집, 동묘동전투에서 순절한 이동연의사도 있다.
해방후 양성이씨는 각계에·인재를 내고 있다. 충북광천 출신으로 6선의원을 지낸 이충환씨, 6대국회의원을 지낸 이돈해씨, 전외무부장관 이동원씨등이 알려진 양성이씨.
현재 국회에는 파주-고양출신 이용호씨가 있고 관계에는 이창기 보사부 약정국장, 이영상 광주지방국세청장, 이정기 주앵커리지영사등이 있다.
학계에는 동양철학의 이상은(고대 명예교수) 이종근(한대 공대학장), 이길종(미 피가딜리대의과) 이주인(미시카고 주립대의과)씨등 40여명이 국내외에서 활약중이며 경제계에는 이경한(한일상선 사장) 이영호(종근당 부사장) 이태용(경화물산 사장) 씨등이 있다.
이규선(화가) 이현옥(화가) 이승(KBS외신부장) 씨등은 문화예술계의 양이 얼굴들.

<다음주는 제주양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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