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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통증 참으며 일일이 전화 응대 … 그게 리퍼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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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마크 리퍼트 주한 미 대사의 한국 사랑은 남다르다. ① 지난달 27일에는 부산 국제시장을 방문해 어묵을 먹었고, ② 1월 아들이 태어나자 ‘세준’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③ 야구팬인 그는 지난해 11월 부인 로빈과 함께 한국시리즈가 열린 목동구장을 방문했다. ④ 트위터에서는 자신의 캐리커처를 사용한다. [사진 리퍼트 트위터]
유지혜
정치국제부문 기자

지난해 11월 6일 오후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아시아재단 6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일주일 전 부임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첫 공개 행사였다. 리퍼트 대사는 부인 로빈과 함께였다. 행사 시간이 되자 참석자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수십 명이 늘어선 줄은 로비 복도 끝까지 길게 이어졌다. 행사요원 한 명이 긴 줄 속에 서 있는 리퍼트 대사 부부를 발견하곤 행렬 앞쪽으로 데리고 와 ‘새치기’를 시켜 줬다. 귀빈이기도 했거니와 만삭인 로빈 여사를 배려한 조치였다. 영문을 모르고 안내하는 대로 움직였던 리퍼트 대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행사요원에게 손짓으로 괜찮다고 한 뒤 부인과 함께 맨 끝으로 갔다. ‘새치기’를 시켜 준 행사요원의 친절이 오히려 더 뒤로 가게 한 셈이다. 그렇게 20여 분을 기다려 리퍼트 대사 부부는 행사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정동 대사관저부터 종로구 대사관까지는 애견 그릭스비와 함께 걸어서 출근하는 일이 잦다. [사진 리퍼트 트위터]

 우연히 이 장면을 보고 나니 리퍼트 대사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만찬 행사 내내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젊은 미국대사’에게 몰려왔다. 그는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에게 싫은 기색 없이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만찬이 끝난 뒤 리퍼트 대사의 접시에는 스테이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난해 10월 30일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한 리퍼트 대사는 어눌한 한국말로 “한·미는 특별한 동반자”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41세 동맹국 대사의 행동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역대 최연소라는 타이틀은 오히려 ‘어리다’는 선입견을 떨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리퍼트 대사는 조금씩, 천천히 한국 속으로 들어왔다. 애견 ‘그릭스비’를 데리고 광화문광장을 산책했고, 트위터에 소소한 일상들을 올렸다. 트위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팔로어들의 메시지에 답을 달아 주면서 그는 ‘선생님’이란 한글을 사용했다. 한국에서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어떤 호칭을 쓰는지 알아본 뒤 선택한 표현이었다.

 이런 노력들로 트위터엔 사람들이 몰렸고, 리퍼트 대사는 점점 한국 속에 동화됐다. 서울에서 낳은 첫아들의 중간 이름을 ‘세준’이라고 지은 건 한국 사랑의 절정이었다.

 그런 리퍼트 대사이기에 이번 비극은 더 안타깝다. 지난 5일 수술을 마친 리퍼트 대사가 입원한 병실 밖으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국대사관 관계자는 “저렇게 웃으시다 상처 부위가 덧날지도 모르는데…”라고 중얼거렸다. 의연한 모습으로 주변을 안심시키려 하는 바람에 더 걱정된다는 얘기였다. 또 다른 관계자는 “턱 부위를 다쳐 사실 말할 때마다 굉장히 아파한다”고 했다. 의료진도 “말하는데 지장은 없겠지만 얼굴 근육을 움직이면 흉터가 더 커질 수 있으니 말하지 말라”고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리퍼트 대사는 수술받은 지 몇 시간도 안 돼 윤병세 외교부 장관, 박근혜 대통령과 통화했다. 사실 윤 장관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리퍼트 대사가 “괜찮다. 전화로 이야기하자”고 해 통화가 성사됐다. ‘한국식 예절’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리퍼트 대사는 지금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비극의 순간에도 한국을 향해 여전히 따뜻한 손을 뻗고 있다. 주한 미국대사관과 소통하고 있는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평소 리퍼트 대사가 보여 준 남다른 한국 사랑을 생각하면 ‘sorry’라는 단어로는 안타까움이 다 표현되지 않는다”고 했다. 리퍼트 대사의 트위터와 블로그에 응원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시민들도 같은 마음일 게다.

유지혜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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