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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거창 강릉 백천 유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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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우리나라 유씨의 시조는 유전이다. 그는 본시 지나 송나라때 병부상서의 벼슬을 지내다 왕안석의「신법」개혁정지에 반대, 벼슬을 버리고 고려에 망명, 귀화했다고 한다.
고려 문종36년(1082)으로 후손들은 귀화연대를 추산한다.

<전국에 20여만명>
그아들 유견규(견규) 가 도첨의찬성사(도첨의찬성사) 벼슬에 오르고 거타군에 봉함을 받았다. 거타는 오늘의 경남거창군. 이로써 거창을 본관으로 쓰게됐다.
전의 세아들 가운데 둘째 견구는 대사헌, 세째 견익은 좌복야참지정사에 올라 유씨가는 가문을 열면서부터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이후 30여대, 유씨는 전국에 20여만명, 성별인구순위 34위의「저성」으로 발전했다.
견규의 후손가운데서 유창이 조선개국공신으로 지금의 강릉인 옥천부원군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본관을 강릉으로 쓰게됐고 그보다 웃대에서 견익의 후손 가운데 유국추(국추)가 고려의 문하평장사로 백천군(황해도백천)에 봉함을 받아 역시 후손들이 백천으로 분관, 거창 강릉 백천의 3본으로 나위었으나 모두 한 핏줄. 유전을 도시조로 받든다.
그중에도 번창하기는 강능유씨로 수도 가장 많고 인재도 많이 냈다.
고려조의 두드러진 인물만 해·연·경 등 3명의 대제학과 찬·환 2명의 대사헌을 비롯, 10여명을 헤아린다.
특히 고종때 좌간의대부로서 지공거를 겸했던 충기는 시문에 뛰어나 『한림별곡』에서『충기대책』이라고 일컬었을 만큼 당대의 1인자였다.
문에서뿐만 아니라 무에서도 많은 인물을 냈다. 원종때 대장군을 지낸 유존혁은 1270년 고려가 몽고와 강화,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할때 배중손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이른바 삼별초란을 일으켜 강화정부의 상서좌승이 되었다. 삼별초 근거를 진도로 옮기자 남해현을 거점으로 인근 고을을 장악했다. 1271년 다시 근거를 제주도로 옮겨 고려인의 불굴의 투혼을 발휘하다 장렬하게 순국했다.

<조선 개국에도 참여>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는 교체기에 유환은 불사이군의 절개로 거창의 금원산기슭에 칩거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창은 조선개국에 적극적으로 참여, 유씨가의 중흥을 열었다. 유창은 고려가 몰락의 길에 접어든 공민왕20년(1371년)에 문과에 급제, 성균학유를 거쳐 박사, 문하주서에까지 올랐다.
그는 태조 이성계와 친교가 두터워 항상 측근에서 강론했다.
이런 연유로 조선개국에 참여, 2등 공신으로 대사성에 올랐으며 그후 좌부승지, 중추원부사 등을 지내고 옥천군에 봉해졌다. 그는 태조가 왕자의난을 거쳐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분격, 소요산에 들어갔다가 태종의 간곡한 청을 받고 태조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후 예문관의 제학, 대제학, 세자우부빈객 등을 두루거친 뒤 1408년 삼지의정부사에 올랐다.
태조가 죽자 스스로 수묘관이 되어 3년간 묘를 지키는 의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태조로부터「공심일시」라는 친필휘호를 받기도 했는데 지금도 경북칠곡에 있는「어필각」에 보존돼있다.
조선조에서도 유씨네는 고려조 못지 않게 인재를 냈다.

<임난땐 유극량 활약>
그중 문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선조때 문장가 유호인. 경서와 사기에 통달, 벼슬은 진사에 그쳤으나 조헌·김장생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후진양성에 힘써 추앙을 받았다. 선조27년인 1574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그는 살신기우를 결심, 장작더미를 쌓고 올라앉아 비를 빌면서 장작에 불을 지르게 했다. 그때 갑자기 큰비가 내려 가뭄을 그치게 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일로 왕으로부터「천방」이라는 호를 받기도 했다.
임진왜란때는 전라수사 유극량이 임진강에서 전투하다 장렬하게 전사하기도 했다. 그는 전란 후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개성의 숭절사에 모셔졌다.
유한량은 당시 무장현감으로 금산의 패전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병사 수백을 이끌고 진주성싸움에 참가, 적을 무찌르다 화살이 떨어져 죽창으로 싸우다 남강에 투신자살했다.

<문인화가 혜산·학석>
조선조말 사회변동기에 사역원당상역관이었던 유진길은 천주교에 입신, 순교자가 됐다. 그는 중국어역관으로 전후8차례에 걸쳐 사신들을 수행,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1823년 천주교인 홍암브로시오를 만나 교인이 된다.
그는 1925년 교황청으로부터 조선순교복자에 올랐다가 올해「성인」으로 추서됐다.
이밖에 산수·인물·화조 등에 능통했던 문인화가 혜산 유숙과 학석 유재소도 있다.
근대에 들어 한말 선각자 오경석과 함께 우뚝한 유대치가 있다. 그는 원래 한의사였으나 역관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가져온「서학」서적을 탐독, 일찌기 개화에 눈을 떴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당인사들의「대부」로 큰 영향력을 행사, 『백의정승』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발 전라도 함평에서 거병, 전라도일대의 왜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유병기, 3·1운동당시 33인중 기독교대표로 참가했던 악포 유여대, 안중근과 함께 하르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살해한 유동하의사, 의열단의 유석현(현 민정당총재고문) 등 많은 독립투사들을 유씨가는 냈다.
해방후엔 전 국무총리 유창순, 국방장관을 지낸 유재흥, 전 서울대총장 유기천, 국회의원 유옥우 전 대법원판사 유재방씨 등이 각계에서 두드러진 이름. 언론계에 유봉영 전 조선일보편집국장·부사장, 유승범 전 합동통신 편집국장·연합통신상무, 소설가 유현종, 미술평론가 유준상, 화가 유세종씨 등도 있다.
▲다음주는「목천 마씨」
(글 이만훈기자 사진 양원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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