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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은 333배, ‘아베 담화’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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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도쿄 총국장

일본의 ‘기념’ 집착은 유별나다. 기념비적인 날을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다. 숫자와 격식을 중시하는 국민성이 반영된 결과다.

 가장 두드러진 최근 사례 하나.

 JR(일본철도)은 도쿄역 개업 100주년이 되는 지난해 12월 20일 도쿄역에서 기념 승차권을 ‘한정 판매’할 예정이었다. 가격은 한 장에 2000엔(약 1만8600원). 그런데 제작비와 인건비를 감안하면 팔면 팔수록 적자였다. 그래서 JR은 1만5000장만 판매키로 하는 꼼수를 냈다. 그러곤 “밤새 줄 선 사람에게는 안 판다. 첫 열차를 타고 온 이들부터 판다”고 했다.

 그런데 당일 JR 스스로 이 원칙을 깼다. 그러자 평소 질서 잘 지키기로 유명한 일본인 사이에도 새치기와 욕설이 난무하는 대혼란이 벌어졌다. JR은 2시간30분 만에 두 손을 들었다. “희망자 전원에게 신청 접수를 받겠다”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난 주말 마감된 최종 신청 건수는 499만1000장. JR로선 ‘한정 타깃’으로 삼은 1만5000명의 333배에 달하는 ‘숨은 진심’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달리 해석하면 당일 원칙만 제대로 지켰다면 333배의 뒷감당(적자)을 지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순간의 오판 때문에 JR은 결국 ‘102주년’이 되는 내년까지 100주년 승차권을 계속 찍어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다음에 다가올 기념행사는 종전 70년을 맞는 오는 8월 15일의 ‘총리 담화’다.

 이를 위해 아베 총리는 지난 19일 16명의 민간인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발족한다고 발표했다. 이름도 거창하다. ‘20세기를 돌이켜보며 21세기의 세계질서와 일본의 역할을 구상하기 위한 유식자 간담회’. 긴 이름만큼이나 ‘아베 담화’ 발표에 대단한 역할을 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들의 제언은 어디까지나 참고로 할 뿐”(스가 관방장관)이란다. 말 그대로 들러리다. ‘아베 담화’의 내용은 이미 아베 머릿속에 있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들려온 소식 하나가 머리를 띵하게 한다. 오는 4월 말 미국을 방문하는 아베가 미국과 ‘공동문서’를 발표할 것이란 뉴스다. 일본의 진주만 침공에 대해 미국에 사죄하는 내용을 담을 것이라 한다.

 한마디로 ‘아베 담화’에선 ‘식민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 ‘침략전쟁’ 같은 그동안 일본이 고수해 온 원칙과 약속을 확 들어내는 대신 미국에는 별도의 선제적 ‘한정 담화’를 내겠다는 꼼수다.

 이는 JR의 도쿄역 100주년 승차권 해프닝과 닮은꼴이다. ‘숨은 진심’을 외면하려 한다. 그러곤 원칙과 약속을 깨려 한다. 꼼수의 결과는 같다. 대혼란과 이반이다. 문제는 이번 오판의 뒷감당은 JR의 333배보다 훨씬 더 강하고 오래오래 일본 전체를 억누를 것이란 점이다.

 말이 종전이지 정작 창피해야 할 패전 기념으로 본전도 못 건질, 아니 두고두고 불행의 씨앗이 될 기념담화를 내겠다니 정말로 유별나고 독특한 ‘기념 집착’이 아닐 수 없다.

김현기 도쿄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