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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무상 결혼' 공약하면 차기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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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논설실장

설 연휴가 끝인 그제, 가까운 친구가 모친상을 당해 왕복 700㎞의 고향을 다녀왔다. 늦은 밤 시골 병원의 장례식장에 고향 친구들이 모처럼 둘러앉았다. 낯익은 반가운 얼굴끼리 짧은 안부를 물은 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얼마 전 치른 친구 아들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삽시간에 대화가 달아올랐다. 50대 중반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아마 우리 사회의 대표적 단면이 아닐까 싶어 소개한다.

 “그놈은 사고를 쳐서 일찍 애를 낳았고, 그 아들 녀석이 의대를 나와 그렇지… 요즘 결혼이 어디 그리 쉽냐?”

 “난 아들만 둘이야. 29살, 26살. 걔들 생각하면 밤에 잠도 안 와.”

 “사내 애들은 군대 갔다 오고, 어학 연수나 스펙 몇 개 쌓으면 벌써 27살이야. 번듯한 직장은 바늘구멍이고…. 우리 때야 골라서 갔는데….”

 “대기업에 들어가도 캄캄해. 1년에 1000만원만 모아도 장하지. 여기 지방 소도시 아파트 전셋값도 1억3000~4000만원이야. 요즘 집 안 해오는 남자한테 오려는 처자가 어디 있어? 아들 한 명 결혼에 적어도 1억원이야.”

 “딸 둘은 금메달, 아들 둘은 진짜 목메달이야….” 아들만 있는 친구 녀석들의 푸념이 끝없이 늘어졌다.

 구석에서 잠자코 있던 딸만 가진 친구 두 녀석이 느닷없이 역성을 냈다.

 “야, 인마! 듣자 듣자 하니까…. 요즘 사내자식들도 얼마나 영악한지 알아? 여자가 제대로 직장을 다니는지, 맞벌이할 수 있는지 얼마나 따진다고? 그 눈높이에 맞추는 것도 장난이 아냐, 인마.”

 “전셋값이 오르긴 했지. 그래도 신부 측에 전셋값 좀 보태달라면 말을 안 해. 왜 1500만원짜리 예물시계나 밍크 코트, 명품 가방같이 쓸모없는 혼수를 요구하는 거야? 전셋집에 뭉칫돈을 넣은 신랑집이 배가 아픈 게 아닐까?”

 딸-아들만 가진 양쪽 집안의 말씨름은 젊은 세대를 향한 집단 성토로 이어졌다.

 “진짜 요즘 애들은 왜 이래? 우리 때는 반지하 월세방에서 시작했는데….” “모태 갑(甲)질이 따로 있나. 명절 때 ‘결혼 안 하니?’라고 묻는 게 금기어라며?”

 그러고도 해답을 못 찾은 친구들은 신문사에 다니는 필자에게 마지막 분풀이를 해댔다.

 “니네 신문은 복지 포퓰리즘 하면 나라 망한다고 쓰더라. 완전 잘못 짚은 거지. 결혼을 못하면 애들을 못 낳고, 아무리 무상보육·무상급식을 해도 절대 우리나라는 안 망해.” “솔직히 제대로 정신이 박혀 있다면 무상보육·무상급식보다 무상결혼이 우선 아니냐? 요즘은 결혼하면 1억원을 주겠다던 허경영 후보가 다시 보여.”

 설 민심이 이런 분위기라면 ‘무상 결혼’을 공약하는 후보가 차기 대통령 0순위다. 여야가 앞다투어 이슬람국가(IS)처럼 “전셋집을 얻어오는 신랑은 참수한다” “100만원 이상의 혼수를 요구하는 시부모들은 징역 5년에 처한다”는 형법을 만들지 모른다. 진짜 통 큰 정치인이라면 “모든 결혼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겠다”고 화끈하게 내걸 것이다. 재원 부족은 걱정 마시라. 이미 정해진 답변이 마련돼 있다.

 기획재정부=“재정 건전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이상이다. 부족하면 담뱃값을 또 올려 국민 건강 챙기고, 연말정산 때 왕창 뜯어내 12개월 무이자 할부로 하면 된다.”

 문재인 야당 대표=“100조원 부자 감세만 철회하면 다 된다.”

 박근혜 대통령=“그래서 내가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거잖아요.”

 우리 사회의 근대적 결혼 관행은 1960~70년대 초반에 굳어졌다. 당시엔 신혼집과 가전·생활용품의 비중이 대략 6:4였다. 지금은 신부 측의 값비싼 혼수 비용을 포함해도 8:2 정도로 벌어졌다. 양가의 총 결혼 비용은 평균적 가정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았다. 결혼을 안 하는, 아니 못하는 불임(不妊)의 사회엔 미래가 없다. 노사정이나 복지-증세 논쟁보다 비뚤어진 결혼 관행부터 바로잡는 국민적 대타협이 우선일 듯싶다. 단지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지극히 심각하다.

이철호 논설실장